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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Feb 25. 2024

보이는 것, 보는 것(자화상)

관찰이란 무엇이길래

1. 보고 또 보고


주말마다 출근하는 대치동 학원가의 모 미술학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볼 때, 특히 눈을 보면 늘 느끼는 것이 있다.


참 한없이 진지하다.


미간에 여덟 팔 자를 그린 채 그려야 할 대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자못 형형하다.

고개를 좌우로 꺾어 보고,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일어나서 물러나 전체를 보고, 연필깍지를 길게 뻗어 재면서 본다. 겨우 십여 년의 인생을 살아온 녀석들의 고사리 같은 손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연필 또는 붓.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점과 선은 아롱다롱, 아이들의 손은 아기자기 귀엽기 그지없다.


연필을 밤새 깎아 준 부모님의 손길이 아이들 필통 곳곳에 남아 있다. 물감이 빈 곳을 채워주는 아빠, 엄마의 시간은 어떻게 지나가고 있을까. 아이의 꿈을 향한 노력을 뒷받침해 주려는 부모님도 함께 꿈을 꾸고 있다. 문득 사랑이 묻어남을 느끼며 뭉클해지곤 한다.


필자의 필통 세 개 중 하나. 약 백여 자루의 연필과 펜이 들어 있다.


어쩌다 그림을 망치면 아이들 두 눈에 실망감이 가득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난 왜 이렇게 못 그릴까. 이러다 가고 싶은 예술중학교, 예술고등학교에 못 가는 게 아닐까.

내가 정말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대로 그림을 배워나가도 될까.

아이들의 두려움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아리다.


그럴 때면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괜찮아. 지금은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거야."


사실이 그렇다. 단련하여 실력을 습득한다. 그게 연습이다. 아직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연습이 더 필요하다. 보고 또 본다. 미술가의 연습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2. 본다는 것의 의미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능동성이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우리 눈에는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무얼 볼 것인가 선택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관계없이 그냥 보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은 다르다.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하기 위해, 또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생각하며 보는 것이다.


관찰의 의미를 뜯어보자.

볼 관(觀) 자는 볼 견(見) 자와 황새 관(雚)을 합쳐 만든 형성자이다. 살필 찰(察) 자는 집 면(宀)을 부수로 하여 제사 제(祭)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그렇다면 관찰이란, 황새가 창공을 날며 보듯 크게 보고, 제사 지낼 때 정성껏 상을 차리듯 자세히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는 의지와 능동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수동적이면 안 된다. 새로움을 발굴하고 개척하는 시선이어야 한다. 산은 늘 그곳에 있지만, 새로운 등정 루트를 찾아 정복하는 등산가처럼.


3. 작품 건너편의 시선


시선이 향하는 모든 곳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은 자신일 것이다. 작가들은 거울을 들여다 보며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고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부터 작업의 출발 지점을 찾곤 한다. 자화상이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 중 한 가지다.

 고흐는 자화상을 무척 많이 남긴 작가다. 겨우 37세의 생애 전반을 걸쳐 미술가로서 보낸 시간은 고작 10년 정도인데, 남긴 자화상은 무려 43점이나 된다. 그의 열정으로 가득하고 진지한 눈빛은 지금도 살아서 이쪽 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반 고흐, <자화상> , 1889년. 캔버스에 유채, 65cm × 54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반 고흐, 화가로서의 자화상 ,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65.1×50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갱 역시 자화상을 꽤나 남긴 편이다.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해가는 고갱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특히 고흐에게 선물한 <레 미제라블>은, 그림을 받은 고흐가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의 소설로부터 제목을 지은 이 그림을 보며 주인공 장 발장의 삶과 자신의 입장을 겹쳐 본 고흐는, 함께 예술 세계를 개척해 나갈 진정한 동지를 발견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동행은 겨우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38×46㎝, 1889~1890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폴 고갱, <레 미제라블>, 캔버스에 유채, 44.5×50.3㎝, 1888년,  반 고흐 미술관

램브란트도 빠질 수 없다.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 그린 젊고 위풍당당한 모습의 그와, 재정난을 겪으며 추레한 모습을 가감 없이 남긴 노년의 모습을 보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돌이켜 보게 된다. 가졌던 것을 잃고 나서 초라해진 거장의 자화상. 그러나 그의 원숙한 실력만은 각박한 세상도 빼앗아 갈 수 없던 모양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필치 이상의 무언가를 노년의 그가 그린 그림에서 느끼게 된다.

렘브란트, <34세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40년. 사진 출처: 영국 내셔널갤러리
렘브란트,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59년, 워싱턴 D.C. 미국국립미술관 소장


자화상을 보면 늘 궁금한 것이 있다. 사람이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얼굴은 자신의 것이다. 아침에 세안을 할 때부터 자기 전까지 매일 보는 얼굴이다. 터럭부터 점 하나까지 세세한 것들을 모두 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대가들은 작품 너머에서 시공을 넘어 우리를 바라보며 뭔가를 묻는 듯하다.


"당신은 매일 보는 것들, 늘 가는 장소에서 뭔가 새로이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아마도 작품을 보는 내면의 내가 만들어낸 물음일 것이다.

그들은 거울을 보며 무엇을 발견하고자 했을까. 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하고 있었을까.

나도 그것을 발견하고, 알아내야겠다.


즉, 작업을 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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