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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다

억울하던 며느리의 시간마저 그립다니(244)

by 봄비전재복


어처구니없다. 지나간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변질되어 오는 것이구나!

50년 가까운 세월,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과 3년 전까지 나는 며느리로 불리었다. 견고한 성곽 같은 맏며느리, 위로 아래로 받들어 모실 상전만 수두룩한 집안의 충실한 종복같았다.



3~40년 전에는 명절 연휴라는 것이 길어야 이틀이었다.

명절 전날 교장실에 들러 눈치껏 인사를 하고(빈손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교감님께도 그런 비슷한 인사를 드리고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퇴근을 했었다.


어린것들 둘을 앞세우고 짐가방 둘러메고 털털거리는 시골 시외버스에 실려 시댁으로 들어서면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별의별 냄새가 넘치는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아이들도 나도 심한 멀미로 곤욕을 치렀으니 남편은 또 얼마나 난처하고 힘이 들었을까!


하여튼 그렇게 다저녁에 시댁에 도착하면 눈치가 보여 쉴 새 없이 어머님이 준비해 놓으신 명절음식 채비를 돕느라 발바닥이 불이 났다.


순창 시골에서 근무한 기간이 겨우 삼 년이었기에 망정이지 더 길어졌다면 어쨌을까? 명절이 다가오면 이삼일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곤 했던 그 지긋지긋한 차멀미의 기억! 군산으로 다시 복귀해서도 버스 타는 일 말고는 비슷한 상황은 되풀이되었다.

조금 일찍 나오기 위해 벌이는 눈치작전과, 시댁에서 되풀이되는 서툰 집안 일로 큰며느리 자리는 늘 좌불안석이었다.


먹는 것 마저 차별하시던 시어머님에게 왜 그렇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나는 안다.

가난한 친정에서 장만한 혼수부터 눈 밖에 난 나는, 집안일은 서툴지, 몸은 약해 빠졌지, 아들은 분가를 선언했지. (두 사람의 월급봉투가 당신에게 온전히 들어오리라 기대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맏며느리 자격이 턱없이 부족한 내가 5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내느라 속울음이 참 많았었다.

그래도 늘 감싸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시아버님이 질화로의 온기처럼 그곳에 계셨다.


아버님은 오래전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님은 10년에서 몇 달 빠진 시간을 나와 합가 하여 우리 집에서 사시다가 2년 전에 떠나셨다.

따로 살던 시간도 같은 지역 생활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언제나, 그리고도 시시때때로 우리는 얽혀 살았다.


옥정리에 집을 짓고 어머님과 합가 한 후에도 몇 년간은 변함없이 명절은 나에게 고난의 행진이었다. 다만 실권이 서서히 내 손으로 이양되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머님이 계시니 시동생네 시누이네 식구들이 모여들어 북적였다.

여전히 나는 맏며느리와 안주인 자리를 지켜야 했고, 발바닥에선 불이 났다.


시부모님보다 훨씬 전에 타계하신 내 친정부모님에게 나는 조선시대의 출가외인이었다.

명절이라고 친정에 들러 편하게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웠던, 연로하신 내 어머니 혼자 계신 집에 밤중에야 찾아들어 울음 꾹꾹 눌러 참고 돌아서던 서럽던 며느리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명절의 의미와 색깔이 참 많이 달라졌다.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요즘 세상에 예전 같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으며, 지은 죄도 없이 죽어지내는 멍청한 며느리가 어디 있을까?

실속 있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조금만 도리를 지켜준다면 더없이 예쁘지 않겠는가?


제각각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으로 등 밀어 보내고, 눈 감아 주고, 간소하게 차린 차례상을 치우며 눈물겹던 그 시절 며느리의 시간마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올려 보다니... 어쩔 수 없이 외로움과 친해지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명절 때 쓰라고 송편을 택배로 보내준 제자, 입맛 돋우라고 김치를 담아주신 동네 형님, 정성스레 반찬 4종을 담아 슬쩍 건네주신 친정 언니 같은 분, 갈비를 슬쩍 디밀고 간 후배, 황도 한 박스를 건네준 규림, 산에서 한 알 한 알 모았다는 알밤, 커피쿠폰 등..,넘치는 정으로 배가 부른 한가위였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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