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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뚜기 Nov 04. 2024

이 세상에 우아한 직장은 없다 3

월급은 없다. 경험과 고생의 한 끗 차이

잘 다니던 회사는 꼬박꼬박 월급을 내 통장에 꼽아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삶에 만족감이 없었다.

인생은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결혼하고 아기 낳고 또 그렇게 키우면서 사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재미가 없었다. (사실 지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깨닫고 있다.)

20대였던 나는 31살이 되었을 때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고 자원봉사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30살 즉, 직장을 5년 넘게 다녀서 직급도 오르고 일에 있어서 어느 정도 탄성이 붙었을 때였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가 싫었다. 다른 회사를 가보려고 몰래 지원서도 넣어보았다.


우연히 교회에서 자원봉사와 선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집, 사무실, 그리고 학원, 이렇게만 살던 내게 새로 이사해서 옮겨 간 교회는 뭔가 살아있고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 찬 내 또래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하게 되고 그들이 하는 기도모임도 같이하고 그들이 다니던 모임에도 가게 되면서 자원봉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선하고 거룩해 보이는 삶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욕심으로 꽉 차 있던 나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결국 나는 훈련을 받고 단기 아웃리치를 가게 되었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여기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사숙고의 기도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이 자원봉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할 것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기도로 다잡았다.


아버지는 처음에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직장을 잠시 쉬는 줄로 아셨다.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차마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동생은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로 가게 되었기에 전세로 있던 아파트는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모든 보증금을 빼서 동생의 서울 집을 구하는 데 사용하셨다.

나는 갈 곳이 없을 것 같았지만, 자원봉사 단체에서 운영하는 집에 최소한의 생활비를 내면서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하는 숙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보니 마치 이단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아주 짙지만,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 이상한 이단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번 돈을 거기에 갖다 바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나는 간사들이 사는 단체 숙소(공동생활)로 거처를 옮겼다. 혼자서 돈 번다고 바쁘게 살던 나는 새로운 가족들이 생겨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내가 몸담은 곳은 대표에서부터 신입까지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개인의 필요를 후원으로 일으켜서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였다.

사람이 어떻게 월급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지?


직장을 그만둔 나는 걱정도 있었지만 믿음이 충만했었다. 나를 부르셨다고 믿는 그 하나님께서 내가 받는 월급만큼  후원금으로 주실 줄 알았다.

처음으로 후원을 받은 금액은 5천 원이었다. (2001년이었다.)같이 사역하는 어떤 언니가 나의 소식지를 받고 감동받았다고 준 것이다.

그 후로 매일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날마다 곡예를 타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 불안하긴 해도 염려한 것만큼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리랜서의 삶이 마냥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와 함께 주어지는 책임은 평행저울과 같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죽어도 싫었던 내가 스스로 가난을 자처하며 살게 되다니 글을 쓰는 지금, 그 시간들이 기적같이 느껴진다.


이런 믿음의 실체는 현실에서 벽에 부딪혔다. 현실의 벽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음 글로 풀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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