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글감
재봉틀로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고 했다.
이번 여름에는 엄마를 돌보느라 지쳤다.
예전 어르신들은 친정엄마도 아닌 시어머니 수발까지 어찌하셨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백내장 수술을 3년 전에 하신 80 중반의 할머니이고 치매가 점점 진행이 되고 있다.
혼자 머물고 계신 집에서 부지런히 노치원에 다니며 삼시 세 끼를 해결하고 있다.
집에 오면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다. 치매어르신이 휴대폰을 어찌 보냐 하지만, 이미 손에 익숙해서인지 동영상을 거의 자동플레이 수준으로 본다.
눈이 안 보인다고 내려오라고 전화가 왔다.
S.O.S. 의 자동 버튼은 나다. 자식들이 있어도 언제나 내가 자동버튼이다.
서울로 와서 안과 진료를 받았다.
후발백내장이라고 수술하면 된단다. 새로 넣었던 인공수정체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레이저로 깨끗이 닦아내었다. 2주간에 걸쳐 한쪽씩 시술 같은 수술을 했다.
엄마와 함께 시골에서 차를 타고 올라올 때는 이정표나 간판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
이번에는 눈이 안 보이니 이것도 안 보이고 온 동네가 뿌옇다는 소리를 10번은 넘게 했다.
한쪽 눈이 수술로 깨끗해 지자 다른 쪽이 안 보인다고 계속 이야기한다. 다음 주에 수술할 거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나머지 한쪽도 깨끗해졌다. 엄마는 안과에서 수술받은 기억이 자주 사라졌다.
마지막 점검을 하러 안과에 갔을 때, 다리가 아픈데 안과에는 뭐 하러 왔냐고 핀잔을 주었다. 여기 온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노치원에 가는 6일은 그나마 걱정이 덜하다.
일요일에 교회를 갈 때 휴대폰을 놔두고 갔다가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교회에서 몇번 연락이 왔었다.
이제는 시골교회 사모님이 엄마 집 비번을 아예 기억하고 있다.
목사님을 만났다. 엄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한 번은 집에 못 들어가서 아파트에서 나와 교회 주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교회와 아파트가 담벼락 하나 사이이다.
한 교인이 권사님 어디 가세요 하고 물으니 “나? 어디로 가고 있었지? 모르겠다.”라고 해서 교회로 데리고 왔던 적이 있다고 했다.
상태는 점점 심해질 것 같다.
서울에 온 김에 요양병원 장기투숙고객인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엄마는 보자마자 아버지 멱살을 잡고는 왜 빨리 안 죽고 자식들 고생시키냐고 말했다.
집안에 누군가가 아프면 아버지는 늘 “고마 죽어라”라고 역정을 냈다. 엄마는 그 말이 평생 한이 되었다.
같은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웃고 있다. 아마도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속상한 엄마는 그 길로 기억 저편으로 아픈 아버지를 보내버린 듯하다.
요즘도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자 지팡이 짚고 다니게 하라고 한다. 그게 가능하면 나도 그러고 싶다.
몇 번을 설명해도 소용없다.
오랜만에 언니와 시간을 맞춰서 아버지 면회를 갔다.
아버지는 기분이 엄청 좋아서 연신 웃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제 내가 결혼을 하고 싶으니 누워서라도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너거 언니 보기 미안하지도 않나?”
“네?”
“너거 언니가 니한테 콩팥 줘서 살아났잖아. “
나는 잠시 속으로 그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했다.
“아! 언니야, 내가 아직 시집 안 가서 미안합니다.” 하고는 그 말을 무마시켜 버렸다.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어찌 저렇게 밖에 말을 못 할까?
언니와 나는 씁쓸하게 병실을 나왔다.
언니가 말했다.
“재봉틀로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
(아버지는 3년 차 뇌경색환자이다. 쓰러진 이후로 식도로 음식을 못 넘겨서 콧줄을 끼고 있다. 왼쪽 반신마비이다.)
여든 중반의 남자와 여자는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