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뚜기 Dec 14. 2023

루틴을 벗어나니 새로운 것이 보인다.

오후 1시에 마을버스를 타보니

만 6년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오기를 꼬박꼬박 하던 성실한 직장인이 이제 백수가 되었다.

안식년을 신청하고 합법적인 쉼을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주였다.

정말 몇 달 만에 미용실을 예약하고 오후 1시에 마을버스를 타고 미용실로 가려고 집을 나왔다.


내가 사는 곳은 마을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이라 늘 사람들이 애용하는데

평일 오후 1시에 이용하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서민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는 출퇴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오늘은 화요일이고 평일이라 버스정류장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분은 다리가 불편했고, 다른 젊은 청소년 인지 청년은 의족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목발을 짚고 있어 한눈에 보였다.

그는 분명 제일 먼저 탈 수 있는 순서였는데도 마지막인 나까지 다 태우고 마지막에 버스에 탔다.

눈치를 보니 내가 먼저 타라고 양보해서는 안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버스에서도 한 번도 앉지를 않고 그대로 서서 가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도로는 경사도 심하고 곡선도 심한 구간이라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몇몇 사람들이 앉으라고 해도 그냥 서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종점까지 서서 가는 듯 보였다.

목 뒤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 동생도 그 만한 나이 때에 다리가 아파서 휠체어를 타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공기, 사람들의 눈빛,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당사자만의 큰 생각들이 내게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이었다. 마을버스에서 건장한 남성 한분이 내렸다. 내릴 때 지팡이를 펼쳐서 아 눈이 안 좋으시구나를 알게 되었지

그전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마을버스에서 내려 좁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데 발생했다.

저녁이어서 어둡기도 했고, 우리 아파트 입구가 그렇게 밝지도 않지만, 입구 주변으로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 분은 지팡이의 도움으로 길을 건너려 하는데 마침 입구로 나오던 차가 멈추었고, 지팡이는 그 차 앞바퀴에 끼여 버렸다.

그분은 지팡이를 따라 내려가 무언가에 끼여 있는 지팡이를 빼려 했고, 차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대로 있었다.

내가 차를 뒤로 좀 빼라고 하니, 그제야 지팡이가 빠졌고, 그분은 가볍게 C라는 소리를 내시고는 건너가셨다.


나는 그날도 속이 좀 상했다. 이런 부분은 구청에 민원을 넣어야 하나?

앞이 잘 안보이시는 분,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 어찌 보면 더 편리하게 다닐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우리 아파트는 불편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오래된 임대아파트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휠체어용 경사로는 너무 코너가 급히 돌아가 있어서

어르신들의 전동카가 몇 번이나 후진과 전진을 반복해야 코너를 빠져나올 수 있다.

장애인 전용 주차장은 당연히 없다.

적어도 아파트 입구만이라도 불을 더 환하게 밝히고 주변 도로에 주차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불편한 사람의 심정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발목이 조금만 삐어도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엄마도 다리가 불편하셔서 계단이용을 못하신다.

친한 친구가 좋은 식당이라고 안내를 했는데, 엘베 없는 2층 식당이었고, 가는 곳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단차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장애인들도 비 장애인들도 눈치 안 보고 그냥 편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어딘가를 갈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다닐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한편으로 오늘 버스에서 계속 서서 있던 그 청년은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이 불편해서 서 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앉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눈치 보지 말고 편히 버스 타고 내리고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일꾼을 불러서 한 데나리온 씩 주던 주인이 오후 3시, 오후 5시에도 여전히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던 이들을 불러 일하게 하고 약속한 하루치의 삯을 준 주인과 먼저 불려 와서 일하던 일꾼들이 늦게 온 사람들에게 같은 품삯을 준다고 불평하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그 주인은 참으로 선한 주인이었고, 일꾼들은 늦게 온 사람에게도 하루치 임금을 주었으니 내게는 더 많이 주겠지? 했다.  

약속한 것보다 무언가를 더 기대하며 자신의 기대가 만족하지 못했을 때 불평하는 모습이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에 무언가 모자라거나 부족하거나 불편해서 사람들이 불러주지 않아 서성대고 있는데 어떤 선한 사람이 나를 불러서 일을 준다면?

그것도 이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아서 한 시간만 일해도 하루치 일당을 받게 되는 시간에 불러준다면?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내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