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응원이 되는 책 속 징검다리
행간을 넘어서
행간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책 읽기가 서투르던 시절, 마음속에 스윽 와닿는 한 문장의 글귀를 깊이 들여다보며 쉼표처럼 쉬어가던 때가 있었다. 때로는 ‘아!’라는 환호성과 함께, 때로는 ‘맞아!’ 라며 격한 호응으로 책과 함께했던 날들이었다.
십 대의 독서는 무얼 읽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낯선 모험이었고, 이십 대의 독서는 짐짓 알고 있는 채 하기 바쁜 시간이었다. 삼십 대의 독서는 바삐 흘러가는 시간 따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 급히 휘갈겨 쓴 낙서처럼 제멋대로의 독서였다. 그때그때 위기의 상황이 닥쳐올 때마다 나의 정신과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버티기 위한 임시방편의 독서.
같은 책 다른 느낌이라고 했던가?
초등학교 시절 단골 독후감 소재였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와 「모모」, 그리고 「헬렌 켈러」가 그랬다. 잘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왔던 「데미안」은 이십 대, 삼십 대 삶의 여정에서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마냥 슬펐고 부러웠고 응원하고 싶었던 주인공들의 삶에서 이제 나는 그 상황의 막막함과 두려움과 애잔함 그리고 용기를 읽어낸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 언어는 의미를 잃는다.
십 대 시절 「데미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어두컴컴한 길을 혼자서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인지 모를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편한 두려움을 뒤로하고 짐짓 의연한 척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헤르만 헤세가 인도를 여행하고 40대 초반에 쓴 책이 「데미안」이라고 한다. 십 대 시절 데미안을 만났던 나는 어느덧 40대가 되어 데미안을 본다.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친구를 만나듯 나 자신을 만나듯,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으로 내 심장은 멈춰 고동친다.
니체가 생각이 났다.
‘괴물과 싸우는 자들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ㅡ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가 마주했을 심연.
싱클레어가 거울 속에서 발견했던 데미안의 얼굴.
이질적인 듯 닮은 듯 그 두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내 마음속을 떠 다닌다.
나는 지금 심연을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그 심연 속에서 무엇을 알아차리게 될까.
나의 거울에는 무엇이 비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