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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형 Jan 23. 2023

모두 함께 늙어 간다

나는 생각했던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그사이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집에서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난 장례엔 가지 못했고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묘지에 갔었다.

이건 내가 할머니에 대해 쓴 유일한 글이 되었다. 언젠가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죽으면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싶다. 꼭 집이 아니더라도,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내 육신을 보고 인사했으면 좋겠다.


—-

나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 지는 너무나 오래되었고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깜빡이는 형광등처럼 가끔은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 기억도 그렇게 자세하지는 못하다. 3초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해서 나는 가끔 내 앞에 있는 할머니가 매 순간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면면을 품고 있기 마련이지만 할머니는 마치 한여름 태양 빛을 반사하는 놀이터의 모래알처럼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 같다. 병을 앓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고독을 느끼기 마련이고 우리는 인간이 고통을 통해 무언가 깨닫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도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가 생각한다. 할머니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흔히 늙을수록 아이가 된다고들 한다. 할머니는 팔십 중반의 노인이고,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아이 같다'는 표현이 떠오른 적은 사실 별로 없다. 그렇지만 이 표현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할머니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혼자서는 씻을 수도, 자기 방을 찾아가지도 못한다. 낯선 순간들을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강아지라고 부르고, 무얼 물어도 엉뚱한 답을 한다. 그런 걸 아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할머니도 점점 아이가 되어 간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할머니는 거실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이 부러졌다. 119를 불러서 병원에 모시고 가서 깁스를 하고 왔다. 계속 깁스에 감긴 붕대를 풀려고 하는 할머니와 승강이를 벌이다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룻밤을 보냈고, 아침에 깁스를 풀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고 우리 가족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팔을 다쳤다는 사실을 잊었고, 왜인지 팔은 계속 아픈데 그게 깁스 때문이라고 생각해 다 풀어 버린 것이다. 한국의 치매 인구가 50만 명이 넘는다는데 누군가는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간병하는 며느리들의 고충을 담은 글들과 알츠하이머 환자가 주인공인 영화 내용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아주 나중의 인생 계획까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항상 멋있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무료하게,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멋있는 할머니. 하지만 한 집에서 같이 사는 할머니의 나날을 지켜보면서 늙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매번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내가 생각한 대로 늙을 수 있을까? 할머니를 통해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시간을 미리 살아 보는 기분이 든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 꽤 구체적인 고민거리들을 안겨 준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누구에게 의존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나는 누군가가 의존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식이 여럿이라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있었지만,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면 누가 날 돌봐 줄까? 사회가 나를 책임져 줄까? 보험을 몇 개쯤 들어 둬야 하는 걸까? 그 미래엔 저렴하고 서비스 좋은 요양원이 존재할까? 가족이 우리 할머니에게 하는 것만큼 그들도 나를 상냥하게 돌봐 줄까? 어쩌면 가족들이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이 아닐까? 아니면 그전에 인류는 알츠하이머를 정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환자를 돌보는 로봇을 들이게 될까?


병이나 죽음은 아무도 미리 계획할 수 없다. 할머니를 보면서 가끔은 건강하되 너무 오래는 살고 싶지 않다 생각도 해 보지만, 그 역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이 먹고 쇠약해지는 것,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어려움을 혼자서 견딘다면 얼마나 막막할지 깜깜해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딸이나 며느리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을 사회가 나누어 가질 수 있을지,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인정된다면 어떨지, 생활동반자법이 생겨서 내 친구가 법적 가족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불안함은 줄어들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아파도 돈 걱정을 덜 수 있을지, 어떤 재분배 시스템을 갖게 되면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말이다.


이 막연한 고민과 상상 속에서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은 나 혼자만 늙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새해가 되고 모두 같이 한 살을 먹었다. 우리 모두 늙을 거란 사실엔 변함이 없고, 어쩌면 아플 수도, 외로울 수도 있다. 올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 가는 것들에 대해, 건강과 내면의 변화에 대해,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뒤따라오는 불안과 두려움과 기쁨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누고 싶다. 서로를 버팀목 삼아 상상해 보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라는 벼랑에 훅 떨어져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본 원고는 2018년 1월 25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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