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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원 Nov 24. 2024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사랑과 이해의 일상 속에서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남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남편의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한 톤 낮아진 내 음성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아니... 한두 번도 아니고 요새 들어 너무 자주 거의 다 이렇잖아."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던 남편이 몇 주 전부터 "지옥에서 온 판사"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 회라며 내가 보던 드라마의 채널을 바꾸라고  소리치듯 말한다. 살짝 짜증이 났지만, 안방에서 보면 된다는 생각에 양보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고 예고편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예고편 하잖아!!!!"


남편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 화내면 무서워.'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화내면 무섭다고?'


남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응~ 무서워. 당신 화내지 않아도 될 때 목소리가 커지고 화를 내.’


남편은 젊었을 때 나에게 성질을 부리고, 작은 실수도 이해 못 하고 직원들 앞에서 쏘아붙이곤 했다. 나는 혼자 울며 잠든 날이 많았다. 베개 커버 안쪽에는 눈물 자국이 번져 세계지도를 그렸다.


그런 사람이 이제 ‘당신이 화내면 무서워’라고 말한다. 한순간 믿기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남편의 기억력이 떨어진 것을 확연히 실감한다. 그런데도 젊은 시절 자신의 기억을 믿고 고집부리는 남편을 보며 나는 말했다. ‘제발 이제 자신을 믿지 마요.’ ‘직장에서도 이런 식이면 직원들 힘들걸.’


남편은 ‘손해 나는 것도 아니고, 미안하다. 사과하면 돼’라고 말한다. 한 마디 더 붙인다. ‘나는 내가 잘못하면 밑에 직원이라도 다시 불러 내가 오해했다고 사과해.’ (이 부분은 남편이 좀 멋져 보였음)


며칠 전, 나는 "이래서 황혼 이혼 하는구나"라는 말을 남편에게 했다. 남편은 ‘내가 맞출게’라고 답했다. 

그때도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이제는 자만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생각을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만이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비결이다.


딱딱해진 생각의 주머니를 말랑말랑하게 조물 거리며, 나는 오늘도 유연하게 나이 들어갈 것을 다짐한다.

 이것이 우리 부부가, 그리고 모든 이들이 황혼의 거울 앞에서 마주해야 할 진실일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며칠 전에도 딸이 여행 간다고 셀카봉을 찾았다. 나는 남편이 여행 가방을 정리한 것을 기억하고 ‘여보~ 여행 갔다 와서 셀카봉 어디에 넣었어요?’ 물었다.


남편은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이며 ‘어! 베란다 큰 통에 넣었어.’ 나는 찾아봤지만 없었다. 다시 전화했다.


‘없어.’ 남편은 ‘그럼 등산 가방 안에 있어.’


이번에도 자신감 있는 목소리였다. 

또 없었다. 

남편은 ‘거기 있어~ 잘 찾아봐요’라고 했다. 

베란다를 다 뒤졌다. 역시 결과는 없었다. 나는 두 번째 전화부터 속으로 남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확고한 목소리에 다시 찾았다. 나는 베란다는 포기하고 거실장과 티브이 서랍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장에 셀카봉이 이쁘장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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