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땅콩 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작은 트레이에 봉지 땅콩과 냅킨을 올려 나간다. 손님은 그냥 달라고 했을 뿐인데 어떤 날은 두 봉지를 건넨다. 물론 한 봉지만 건네는 날도 많다. 어떤 날은 미소만 띈 채 드리고, 어떤 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드린다. 매 번 처음 보는 손님이 똑같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주문한 건데 대체 왜?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되는 날이 있고 왠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날이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바로 '그 날의 내 기분'이었다. 몸이 가볍고 기분이 좋은 날은 더 많이 웃게 되고 손님에게도 동료에게도 더 잘하게 되고 더 관대해진다. 한 걸음 떼기도 힘들고 우울한 날엔 정해진 업무만 수행하는 것도 버겁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기분'을 정하는 건 대부분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열 시간 이상을 비행기 안에서 승객의 기분만 살피며 내 체력이나 기분은 신경 쓸 새도 없이 노동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일 하고 해외 호텔에 도착하면 휑한 호텔 방에 나와 내 가방만이 덩그러니 있는데, 수고했다고 등 두드려 줄 사람도 없이 혼자 말없이 씻고 자고 밥 먹고, 다시 비행을 가야 했다. 당연히 혼자 해 나가야 하는 일들이지만 가끔은 서러울 때도 있고, 반면에 자유로울 때도 있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은 나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 임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 만큼은 나에게 잘 해주자.'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다. 그게 결국은 비행기 안에서도 내 기분을 좌우할 테니, 더 좋은 기분에서 더 기쁘게 일 할 수 있도록. 물론 그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체류지에서 예쁜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던지, 현지 맛집을 찾아간다던지, 음악을 들으며 공원을 산책하고, 비행 전만큼은 룸서비스로 맛있는 걸 챙겨 먹고, 잘 자고 일어나 비행 준비를 일찍 끝내고 방에서 나오기 전 잠시 커피 타임을 갖는. 이런 소소한 것들이었다.
행복은 크기보다는 빈도라고 했던가. 이런 아주 작고 소소한 행복들을 자주자주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가능한 한 나 자신에게 집중해서 사소한 행복을 채워두는 것은 내가 남에게 마음을 써야 하는 순간에 좋은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직장에서 지치고 힘들고 눈치만 보는 나지만, 그런 나니까 적어도 나 만큼은 다정히 대해주자. 햇빛을 쬐어주고, 원하는 것을 묻고, 맛있는 걸 먹여주고, 하루에 한두 번은 그 좋아하는 커피도 잊지 말고 챙겨주자. 내가 나를 키우고 돌보는 마음으로. 좋은 기분과 작은 행복을 틈틈이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쌓아둔 것들은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소진되기 때문에 잊지 말고 매일매일 채워줘야 한다.
그러니 잊지 말자. 오늘도 나에게 다정히. 오늘도 고생한 내게 다달이 디저트와 카페인을.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동네 산책을. 선선한 밤공기와 포근한 이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