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입에 담지 못할 금기어, horrible

내가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 1편

by orosi


horrid [ hɔːrɪd; │hɑːrɪd ]

‘끔찍한, 지독한’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좋으니 이렇게 반응해 줬으면 좋겠다. 제발.

‘오탄가? 혹시 horrible 말하는 거 아니고?’

그게 나였다. 그것도 2014년생 딸아이 앞에서.

조용히나 있을걸. 간만에 쪽 팔린다. 교육자로서 다소 저급해 보이지만 어울릴 만한 다른 단어는 못 찾겠다. 쪽팔려 죽겠다.

sticker sticker



중1부터 고3까지 족히 6년 방임의 효과, 열나게 진지했던 자발적 영어학습.

첫 번째 대학 내내, 그리고 교대까지 합친 세월을 차치하고도 대학원 전공마저 하필 영어교육이었는데.

무색하다.

중등 영어교사, 현 초등교사에 행정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영어연수도 했었고 1급 정교사 연수강사, 임용고시 2차 영어면접관, 5, 6학년 YBM 교과서 검토위원까지.

화려하기 짝이 없고, 지금 이 순간 부끄럽기는 또 어떤가?


딸은 내게 질문을 하면 입버릇처럼 대화 끝에 꼭 이 문장을 덧붙이는 아이다.

‘엄만 영어전문가잖아!’


에라이.



“The magic took Chip to the Litter Queen’s palace.

There were piles of litter and junk everywhere. It looks horrid and it smells.”

“Horrid? horrid?”


여기서 ‘턱’하고 돌부리에 걸린 건데 오히려 무식하면 용감한 법.

‘피식’ 비웃었던 거다.

“에이~

뭐야. horrible 아냐? 이거 잘못 나왔네.”

쌔하다. 잠. 시. 침. 묵.

“그래요? 지독하다는 거 아닌가? 꽤 더럽거나? 앞에서 horrible 한 번 나왔으니 또 쓰면 좀 재미없을까 봐?"

권위에 괜한 도전을 했나 싶어 멋쩍은 표정으로 나 한번, 책 한번 번갈아보다 말고 금세 쿨하게 재낀다.


"아님 말고."




막히는 단어가 나오면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그냥 읽는다. 나만 막힌 건가.

음독을 즐기던 아이는 요즘 때를 가리지 않고 다섯 살 동생을 제 앞에 앉힌다. 자기식으로 번역해주는 재미에 오늘도 영어책을 집어 든다. 듣거나 말거나 괘념치 않는 내공이 있다. 둘째가 듣기 거부 기능을 장착한 것처럼.


늘 그렇듯, 잔칫상에 소금만 쳐주고자 곁에 앉았다. 아이가 손을 내밀 때만 기꺼이 ‘함께 읽기’에 응한다. 어디 엄마라는 여자가 할 일이 그뿐이랴. 한석봉 어머니도 심오한 의도로 떡을 썰었다고 보진 않으니까. 떡 썰고 나서도 할 일이 태산이었을 텐데 뭘.

더 시급한 것이 얘(9세 다 큰 놈)보다 쟤(하루의 절반을 징쳐대는 5세 갑질녀)라고 푸념하는 남편은 나의 게으름을 감히 꿰뚫고 있다.

'저건 읽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상당히 교육적 의도가 있는 하는 쇼'라고!

그러든지 말든지 오늘도 가르치지 않는 엄마는 아름답다. 실제 이론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충분히 효과 있는 방법이니 꼭 써보시길.

주방보조 마인드의 아버지들은 알리 없지만(육아에 진심인 아빠들이 태반인 바람직한 시대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우리 엄마들은 배워 익히지 않고도 이미 지혜가 있다. 들어보면 이미 다 하고 있는 것들 투성인 걸 보면 말이다.

alternated reading, 문장이나 문단 혹은 페이지 단위로 부모와 아이가 번갈아 읽는 방법이다.

혼자 할 때 보다 더 신 나하고 어떤 날은 우리 엄마 잘하나 못하나 검열까지 할 태세다.

뭐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체하는 것보단 백 배 낫다. 게다가 효과도 쏠쏠하다.

아이가 소리값을 알지 못했을 때(실제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매칭이 전혀 안 되던 시절) 내가 한 일이라면 그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는 거였다. 정말 별거 없고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어쩜 ABCD도 모르는 애치곤 연기를 곧 잘 해내는 걸 보면 역시 피는 못 속인다.

나 역시

1단계(침착하게)화답하는 연기 +

2단계(시선은 허공에)기꺼이 속아주며 +

3단계(세상 따뜻한 눈빛 3초)격려까지 담아 추임새만 넣으면 그만이다. Brilliant!

철자 식별은 안되지만, 읽는 체하는 단계는 이왕이면 거치고 가는 편이 좋으니까.


이때 부모는 아주 쉬운 수준의 그림책으로 choral reading을 하자. 이마 가득 깊은 주름을 얻은 게 아마 이때부터지 싶다. 5만 원짜리 1+1 부위 국산 보톡스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

둘째에게도 언젠간 이 시기가 올 테니 눈을 너무 크게 뜨진 말아야겠다.




공든 탑은 무너지려고 쌓나 보다. 주로 이날과 같은 오만한 리액션 때문에.


확실해? 엄마는 처음 보는 단언데?”


이쯤되면 아이는 단호한 영어교육 전문가에게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이고,

자랑스런 엄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침착하게' 휴대폰을 집어 든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면 확인 사살은 하고 넘어가야지.


'horrid가 뭐야. horrible이지'

(잘했다! 이번엔 " "가 아니고, ' '를 쓸 수 있었던 건. 정말 잘 한 일이다.)


나의 친구 네이버 어학사전이 답한다.
친절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단골집, 네이버 어학사전



망할! 이건 뭐 동네 개도 선생 할 노릇이다.

사랑하는 딸아, 알려줘서 고맙구나. 잘난 엄마 지금 쪽팔림의 깊이에 (존나)곤욕스럽다.



잠시만!

브런치에 써도 덜 쪽팔릴 뭐 그런 단어 없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좀 더 정제된듯한 유의어 찾기



체면이 깎이다? 부끄럽다? 마음이 불편하다(약한데...)


에이씨! 없네.








출처:픽사베이, 네이버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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