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다. 친정집 식탁에는 김혜수 언니가 모델이던 당시 출시된 지 얼마안 된 인기 전기그릴, 자이글 1세대가 있었다. 산후 조리원을 나와 친정에 도착하기 전, 엄마가 홈쇼핑을 보고 주문하셨던거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던 갓난 둘째를 간신히 재우고 나오면 엄마는 종종 식탁에 놓인 자이글에 고기를 구워주셨다. 첫째가 좋아하는 훈제오리도 올리고 삼겹살도 올리고 가끔은 소고기도 올려 따뜻한 식탁을 즐겼다. 엄마는 고기와 함께 각종채소를 같이 구워주셨는데 수분을 싹 날아가게 구운 버섯이 참 맛있었다. 우리는 매일 고소하고 짭짤한 기름장에 쫄깃하면서 아캉한 식감의 버섯을 구워 먹었다.
각종 버섯을 구워 기름장에 콕 찍어 먹으면 얼마나 입맛이 도는지.
엄마는 엄마가 집을 비울 때도 언제든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 채소칸에 각종 버섯을 잔뜩 구비해 두셨다.
"고기랑 버섯 구워 먹어. 하나 더 주문했어."
아이가 70일쯤 되었을 무렵, 남편이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아빠가 새로 주문한 자이글 박스를 차에 실어주셨다.
- "아이고, 뭘 내 거까지 샀어. 고마워요."
짧은 감사인사를 하면서도 늘 그랬듯 당연하게 받아왔다.
친정에서처럼 한동안은 자이글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둘째가 걸어 다니면서부터는 제대로 사용한 적이 손에 꼽는다. 작은 2인용 식탁을 벽에 붙여놓고 쓰면서 자이글을 올려놓다 보니 어쩌다 사용하는 날은 조리한 음식을 좌식 밥상으로 날라 먹어야 했다.
먹는 자리에서 구워 함께 먹도록 사용하는전기그릴인데 식탁 위에서 고기를 구워 상에 갖다 나르기에 바쁘니점점 사용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사 온 지금 집에서는 드디어 식탁이 제 구실을 하게 되었지만 자이글은 놓일 곳을 잃었다. 모처럼 사용해도 아이들이 만질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생활의 모양에 맞추다 보니 쓰임이 적어진 물건. 그렇게 창고에 들어간 시간이 어림잡아도 4년 이상되었으니 이젠 정말 비워도 되는 물건이라는 결론이 났다.
여덟 살 된 둘째와 나이가 같은 자이글,
친정엄마의 사랑이 담긴 물건이라 내보내기 어려워진다. 자이글이 나간다고 엄마의 사랑이 부정되는 것도, 그 사랑이 증발하는 것도 아닌데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사연이 발목을 잡는다.
정리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 해야 한다 -곤도마리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남김으로지금의 나를 인정한다. 그리고이젠 추억이 될 물건을두 눈에 꾹꾹 담아물건을 건넨 사랑을 회상한다.
그저 딸내미 잘 먹고 애 잘 키우라고 덥석 사주신 그 사랑을 마음껏 받아 누리자. 커다란 마음은 알고 받고 누리되, 물건은 내보내기로 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추억하기로.
이제 나도 그 사랑을 안다. 비싸고 커다란 주방기구를 덥석 사주심으로 표현했던 부모님의 사랑. 아이 낳고 온 딸이 자기 새끼 젖 먹이겠다고 애쓰는 시간, 뭐라도 잘 먹으면 더 해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 아니었겠는가.
언제 울어재낄지 모르는 갓난아기를 돌보며 수유복 마를 날이 없던 나를 위해 따뜻한 고기 한 점 더 먹으라고 전기그릴 전원을 켜두고 식탁에서 기다리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맛있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놓아주면 날름 받아먹던 철없던 딸은 그 시절엄마의 손길이 생각이 나서 코끝이 찡해진다.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큰 아이 손을 잡고 친정집을 나서는 당신들의 둘째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땠을까. 헤아리기 힘들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되는 이유는 8년 전 겨울, 짐보따리에 달려온 물건들 덕분이다.
아기 이불, 욕조, 온갖 용품에 묻혀 온 보자기에 싸인 엄마의 소고기 미역국, 밑반찬, 그리고 커다란 자이글 상자.
사연 없는 물건이 있던가. 물건은 영원할 수 없지만 사연은 영원하다. 추억을 떠올려 삶에 녹일 때 그 삶의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자식에게 식지 않은 고기를 먹이려고 식탁에서 기다리던 부모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져 온다.
자이글이 들어올 때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부모님의 사랑이 물건이 나가는 오늘 더 크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