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에도 변천사가 있다. 어릴적 내 별명은 콩나물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젓가락이었고 청소년기에는 전봇대가 되었다. 내향성이지만 꼭 필요한 경우엔 당차게 표현하는 나를 함부로 놀리는 친구는 없었다. 한동네 사는 나이 차가 근소한 사촌오빠가 짓궂게 놀려댔다.친구들은 내게 전쟁이 나도 피난갈 필요 없다면서 그냥 가만히 서있으라고 했다. 헬기도 전봇대인줄 알고 지나갈 거라면서. 그만큼 마른 체형에 키가 커서 얻은 별명이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어릴적 별명이 평생 갈수도 있는 모양이다. 아직도 나는 길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내가 들은 최악의 별명은 '모난돌'이었다. 예민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을 꼬집으려고 작문 선생님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긍정적인 별명도 있었다. 어깨가 좁고 목이 길어 한복이 잘 어울린다면서 가정가사 선생님이 지어준 건데, 이 시대에 태어나 손해를 보았다면서 '고전미인'이라고 했다. 같은 시기에 작문 시간에는 '모난돌'로, 가정가사 시간에는 '고전미인'으로 불렸다. 노천명의 시에 나오는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란 시의귀절에서 따온 사슴이라는 별명도 그 시절 국어 선생님께 들었다.
집안 어른들은 또 달랐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여섯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해까지 가족과 떨어져 부모님의 고향인 여주 큰아버지댁에서 지냈는데, 큰엄마는 나를 '똑똑이'라고 불렀다. 벽과 천정에 붙은 신문들을 보면서 열심히 글씨를 읽어내는 내가 시골 아이들보다 큰엄마 눈에는 꽤 똘똘해 보였던 거다. 동네 어른들은 서울내기라면서 까도토리라고 불렀다. 무슨 뜻이었는지 물어보지 못했으니 의미를 알 턱이 없지만 가늠해보건데 말씨며 행동이 약아보인다는 뜻이었을 거다.
집에서 엄마가 붙여준 별명은 책벌레였다. 책만 잡으면 밥도 잠도 노는 것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함께 자란 자매들은 서로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민감한 성장기에는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는 것이 우애였다. 아버지는 훨씬 더 코믹한 별명을 붙여주셨다. 징거미. 나는 그것이 거미의 일종인줄 알고 혐오스러워했지만 다리가 긴 민물새우의 일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별명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내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외부의 평가일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별명들이었다. 소심한 나는 자책에 빠지곤 했는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화풀이로 별명을 갖다 붙였다. 상황에 따라 '소심증 환자' 가 되었고, 때론 '못난이', '멍청이', '한심이','주의산만증 환자'가 되았다. 자기 비하에 빠지던 청소년기 습관에서 빠져 나왔지만,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을 뿐 자책의 그림자는 꽤 오랜 시간 내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처음 보았다. 미술선생님이 나를 지목하면서 모딜리아니의 모델 잔 에뷔테른과 닮았다고 했다. 잔과 모딜리아니의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해 주며,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를 사랑한 잔은 그의 작품에 영원히 남았다고 했다. 그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모딜리아니가 되었다. 단지 목이 길다는 이유로.
내가 사는 지역은 교통이 사통팔달 이어지다보니 물류 창고들이 많다. 그 중에는 의류 패션 창고들도 있다. 가까운 곳에서 창고 할인을 하는 브랜드 광고를 자주 접한다. 그 때문에 지인이나 친구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가끔은 창고에서 필요한 것을 구입한다.
몇년 전의 일이다. 어깨 아픈 줄 모르고 책을 잔뜩 넣어서 들고 다닌 덕분에 내 가방은 끈이 망가져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즈음 어깨를 치료하면서 이제부턴 책 욕심을 버리고 가볍고 작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리라 작정했다. 마침 우연히 지나가던 창고매장에서 작은 가방을 봤다. 첫눈에 시선을 끈 가방에 모딜리아니의 유명한 그림 <큰 모자를 쓴 에뷔테른> 이 프린트 되어 있었다. 크로스백, 토트백, 파우치까지 구성된 70% 세일 상품이었는데, 구성품 중 토트백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은 10만원 정도였다.
나는 따로 살 수 있는지 물었고, 판매원은 셋트 상품이라 분리 판매가 안된다고 했다. 필요없는 것까지 구입하고싶지 않아서 구매를 포기했다. 판매원은 값이 쌀 때 구입해서 필요없는 구성품은 누군가에게 선물하라고 설득했다. 토트백 하나만 사도 그보단 비쌀거라면서 가죽 백이 이정도면 돈 벌어가는 거라고 했다.
생각해보고 결정하면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막 나오려는데 매장의 다른 판매원이 나를 불렀다. 토트백만 따로 구입해도 된다면서 3만원에 가져가라고 했다. 판매 책임자이거나 주인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거래가 마음에 들어 가방을 구입했다. 편하게 사용해도 가죽이 상하지도 않고 크기도 알맞아서 지금까지 즐겨쓰고 있다. 나에게 명품이란 내 맘에 들어서 구입해 즐겨 쓰는 물건을 의미한다. 특정 브랜드의 제품인지는 상관없다. 필요에 맞으면 무엇이든 좋다. 선택의 폭은 그러므로 매우넓다.
가장 편하게 들고다니는 모딜리아니 토트백,
앞에서 부연했듯 나는 목이 길다. 불편한 점은 추위를 많이 탄다는 것이다. 목을 따스하게 보호하지 않으면 음성이 변하고 감기에 걸리거나 편도염에 걸린다. 그래서 나는 스카프와 목도리를 좋아한다. 여름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폴라티를 즐겨 입는 것도 그런 이유다.
목을 드러내는 계절이 오면 목걸이를 하라는 참견을 많이 듣는다. 목걸이 두어 점을 필수템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목걸이를 착용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집에 돌아오는 즉시 제거하고 웬만해선 걸지 않는다.
얼마 전 아들이 휴가를 와서 딸과 손자를 데리고 친정부모님을 뵈러 여주에 갔다. 우리 남매들 중 나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체력이 많이 쇠하여 전보다 더 마르셨고, 그래선지 목이 더 길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딸의 요청으로 여주프리미엄아울렛에 들렀다. 입점 무렵 떠들썩한 뉴스거리가 되었을 때 딸이 가고 싶다고 해서 구경간 후로 처음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주차장에서 매장까지 서둘러 걸어갔다. 두 살짜리 손자를 데리고 가서 발걸음은 자주 멈춰졌다. 딸은 손자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서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날이 너무 추워서 쇼핑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아들이 손자를 안고 앞장섰다.
"아우, 구찌는 줄이 길어서 오늘 안에 차례가 안오겠어요."
"구찌는 왜? 아기한테 필요한게 구찌에 있어?"
의아해서 물었다. 하지만 딸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정말 구찌 매장에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서있었다. 예약제로 판매직원 한 사람당 1팀만 서비스 하기 때문이라고 딸이 설명해 주었다.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브랜드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잠시 후에 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엄마 춥죠? 우리 저기 잠깐 들어가요. 나 볼 거 있는데, 보는 동안 매장 안에 있으면 따스할 거에요."
딸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버버리 매장이었다.
"나는 2층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잠깐 보고 올거에요. 엄마는 안올라가도 되요. 심심하니까 여기서 스카프 구경하고 계세요."
나는 그럴 필요 없이 아기랑 같이 올라간다고 했다. 딸은 그제야 말했다.
"아니야, 사실 엄마한테 스카프 하나 사드리고 싶어서 오자고 했어요. 엄마 추워지면 항상 두르니까. 내가 그냥 사도 되지만, 기왕이면 엄마 맘에 드는 걸로 하려고 같이 오자고 했어요."
역시나 목적은 따로 있었던 거였다. 나는 필요없다고 했다. 스카프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크기도 다양하고 컬러도 다양했다. 딸이 신혼여행 다녀오면서 사온 선물도 스카프였다고 상기시켰다. 딸이 한마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는 하나도 없잖아요. 엄마 나이엔 명품 하나쯤 소장해도 되요. 올해는 하나 사드리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가정을 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기를 키우며 얼마나 쓸 곳이 많은가. 그런 중에도 엄마에게 명품 브랜드의 스카프를 사주고 싶어하는 딸의 마음이 만져졌다. 결이 고운 꽃잎처럼 순결한 사랑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온풍이 돌듯 온 몸의 감각이 따끈해졌다. 딸이 주는 명품 스카프를 마음으로 받았다. 딸의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으며 말했다.
"딸 고마워. 엄만 스스로 명품이라고 인정했어. 내가 명품인데 뭐가 더 필요하겠니. 엄마가 쓰면 그게 명품이야. 딸라미 마음은 이미 받았으니 이제 가자."
딸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또 그런다며. 우린 함께 웃었다. 버버리 매장을 나와 브런치 카페로 갔다. 버섯 피자에 허브티를 마시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호기심을 따라 바스락대는 손자와 함께 설경 속에 줄선 사람들과 트리를 바라보며 쉬었다. 손자는 판촉 홍보를 위해 나눠준 풍선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행복하고 만족한 손자를 보면서 나도 즐거웠다. 손자에겐 그 풍선이 세상 소중한 명품이었다. 나에겐 방금 선물받은 딸의 마음이 세상 소중한 명품이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명품이 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관계에서 명품이 되는 삶이 최고의 복이었다.
이십년지기 친구가 생각났다. 늦게 결혼한 친구는 해외 여행을 갔다가 신랑으로부터 루이비똥 가방을 선물받았다. 필요없다고 했지만 신랑은 작정한 건 해야하는 성격이라 기쁘게 받아달라며 결재를 해버렸단다. 그런데 비가 오거나 부부동반 모임을 할 때마다 신랑이 친구에게 당부했다.
"똥이나 잘 챙겨!"
친구는 그 소리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똥보다 내가 명품인데, 그걸 몰라. 내가 언제 명품백 사달랬냐고."
친구랑 이야기 나누면서 이구동성으로 확인했다. 인생이 명품이 아니라면 명품이 뭔 소용이냐고. 먼저 명품이 되는 것이 순서라고.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우리가 명품이 되는 날까지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자고 약속했다.
맞는 말이었다. 생각을 따라가다 멈췄다. 휴대폰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오늘부터 내 별명은 '명품'이다. 라고 썼다. 나 스스로 별명을 부여한 거였다. 당장은 명품이 될 수 없으니, 별명이라도 붙여주는 거였다. 명품이라니, 남이 들으면 부끄럽겠지만, 나 자신에게만 부를 거니까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살면서 자책할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별명들을 상쇄할 듬직한 별명 하나쯤 소유해도 좋았다. 이제라도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보기 위해 창 밖에 빌딩 높이의 트리가 있었다. 금빛과 은빛 방울들이 달린 트리는 대낮에도 전구가 반짝여 눈이 부셨다. 프리미엄 아울렛에 몰려와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90%가 젊은이들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시내도 아닌 경기도 외곽에 있는 명품 브랜드 아울렛 매장을 찾아온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다니. 무언가를 상담하고 구입하기 위해 그 추운 날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을 서다니. 모든 걸 포기해서 더 이상 포기할 것도 없다는 N포 세대가 역설적으로 명품 브랜드를 선호한다니.
명품 브랜드를 대하는 태도에 세대간의 격차가 있음을 느꼈다. 단순히 설명될 수는 없을 거였다. 사회적 뉴스가 통계로 보여주는 걸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는 더욱 없을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고드는 상술에 종용당하지 않고, 현명한 소비를 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원칙과 철학이 필요하다. 스스로 일관되게 인정하고 따를만한 기준을 정하지 않은채 유행이라는 거대한 음모를 추종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부표를 확인하지 않은채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