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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스란 Feb 20. 2023

아주 특별한 졸업

초등학교 졸업이 별건가요

난 졸업식 때 울지 않는다. 아니 눈물이 나지 않는다.

졸업식장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만 난다.     


“학부모님, 초등학교 졸업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아이들에겐 나름 진지한 졸업식인데 이렇게 담임이 물으니 차마 소리 내어 동의는 못 하시고 알면서 그러냐는 듯이 웃으신다.

“그런데 제게 졸업식은 별일입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합니다.”

“제게 이번 졸업식은 세 번째입니다.”

다들 놀라는 눈치다.

20년 경력이 넘는, 나의 아이를 맡았던 교사가 6학년을 이제 세 번째로 맡은 것이라니.   

  



나의 첫 졸업식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6학년 담임, 나와 가장 나이 차가 적고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학생들과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함께했지만 내가 그 해를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아이들을 통틀어 가장 진하게 기억나는 이름은 단 하나, ㄱㅈㄱ.     


내 교직 인생 중 흘릴 눈물은 그날 다 흘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학교는 학급수가 워낙 많아 교실에서 졸업식을 했다.

번호 순서대로 한 명씩 호명하면 아이들이 나와 졸업장과 학교장상을 받은 후 부모님의 축하 꽃다발을 함께 받고 사진을 찍었다.

1, 2, 3번까지는 활짝 웃으며 잘 진행했다.

4번 ㄱㅈㄱ. 이름을 불렀다.

아무 대답이 없다.

졸업장과 학교장상을 뒤쪽으로 넘기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순간 눈물 렌즈 너머로 아이들이 어른거렸지만, 고개를 들 수도, 다음 번호의 아이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계속 멈춰있을 순 없었기에 끄억끄억 눈물을 삼켜내며 다른 아이들에게 졸업장과 학교장상을 건넸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느라 눈에 핏기가 돌고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은 채로 졸업식을 마쳤다.

축하받으며 활짝 웃어야 하는 아이들이 나를 달래주거나 따라 울었다.

부모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계속 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미안함과 죄송함이 남는다.

그 아이의 졸업장과 학교장상은 졸업식의 분위기가 다 꺼진 늦은 오후 할머니께서 찾아가셨다. 결국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남아있던 눈물까지 모두 쏟아내었다.     




ㄱㅈㄱ.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시던 그 아이는 종종 집을 나가 다른 곳에서 잤다.

그렇다, 가출했다.

할머니는 집에 안 들어온 날엔 밤을 지새 기다리시다 아침이 되면 내게 전화하셨다. 그리고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이를 찾아다니셨다.

ㅈㄱ이는 가출하던 와중에도 가끔 학교에 왔다. 학교에 와서는 조용히 앉거나 엎드려 있었는데 친구들과는 문제없이 일과를 마치고 갔다.

며칠 만에 오면 남겨서 이야기도 나누고 어르고 달랬다. 내 정성을 다 쏟았다.

밥이라도 먹으러 오라고 했다. 학교만큼은 오기 싫은 곳이 되면 안 되었으므로.

연달아 학교에 오지 않거나 어디에서 봤다는 얘기라도 들으면 전담 시간에 외출을 달고 그 장소 주변을 돌았다. 주로 근처 빌라 지하나 옥상, PC방, 공원, 상가 주차장 등 갈 수 있는 곳은 다 갔다.

특히 근처 PC방 주인 또는 알바생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학교 갈 시간, 청소년 출입제한 시간에 왔는데 연락 안 하면 신고할 거라고 협박까지 하며 다녔다.

밖에서 만나 학교에 데리고 들어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못 보게 피한 적은 있을지 몰라도 다행히 눈 마주치고 도망간 적은 없었다.

그랬던 그 아이는 11월 중순, 본격적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동네를 떠났다.

마지막에 있었다고 한 곳은 빌라 옥상 계단실. 버려진 매트와 이불, 난로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집에서 불과 10분도 안 걸리는 곳이었다.

추운 날 밤에 오들오들 떨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냥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는 가끔 함께 있었다는 어른을 따라 떠난 듯했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나의 첫 졸업생이었던 그 아이들을 그렇게 보낸 후 마음이 너무 힘들어 6학년을 할 수가 없었다. 졸업식에서 축하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아이의 안부를 마음속으로 물었다.

한 해 한 해 수많은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며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8년이 지나 새로운 학교로 옮긴 첫해 6학년 담임이 되었다.

(보통 4년에 한 번 학교를 옮긴다.)

한 반에 32명, 덩치도 크고 학생 수도 많아 교실은 더욱 꽉 차게 느껴졌다.

늘 그렇듯 열심히, 즐겁고 행복하게 아이들과 한 해를 보내려고 마음먹었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두 번째 6학년을 만난 그해 2014년.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내 앞에 있어야 하는 아이가 없다는 끔찍하게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결국 오지 않는 아이에 대한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에게 아이들의 상실감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매일 머리가 아팠고 심장이 두근거렸으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해 아이들과 함께하려던 즐거운 계획은 하나둘 취소가 되었다.

그냥 내 앞에 아이들이 온전하게 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저 좋았다. 감사했다.

졸업식 날 제일 많이 한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다.

건강하게 잘 있어 줘서, 나와 즐겁게 한 해를 보내줘서, 열심히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

당분간은 6학년을 안 하며 이 행복했던 기억을 오래 끌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난 2022년.

새 학교로 옮기고 선택하지 않았지만 6학년 담임이 되었다.

그만큼 선생님들에게 6학년은 부담이 크게 느껴진다.

시간과 노력이 더 듬뿍 들어가지만, 맘처럼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한편 6학년 담임이 되면 더 멋진 어른이자 선생님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6년간 몸과 마음이 훌쩍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에 디딤돌이 되고 언덕이 되고 싶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학교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다.

화면으로만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날이 있었고 코로나19 양성판정으로 인해 번갈아 가며 등교 중지되어 전체 아이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불안한 분위기에서 가정학습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체험학습을 가는 아이들이 생겼고 다시 코로나19로 인해 격리되었다.

가을 이후에는 독감이 유행하여 돌아가며 결석했고 졸업식 날에 못 온 아이도 있었다.

올해까지 참 들쭉날쭉한 날들이 많았다.

때문에 졸업식 날까지 아이들 전체가 마스크를 벗은 채 온전한 얼굴을 한꺼번에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졸업생들은 좀 크고 얼굴이 바뀌면 못 알아볼 아이들도 있을 것 같다.     


20년간 교직 생활 중 단 세 번. 졸업생을 두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있어 초등학교 졸업식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나의 소중한 졸업생들 사랑하고 사랑한다.      


매해 졸업식과 종업식을 빌어 꼭 전하는 내 마음이다.

“너희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사랑스럽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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