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니? 정말로?
우리는 저녁 식사까지 함께 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다며 카페에서 내 손을 잡고 만지작 거리며 저녁까지만 같이 먹자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데이트 신청을 해 왔다. 점심 때 까지 무덤덤하고 말없던 사람이 갑자기 남자애가 되어 진한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나. 나 역시 카페에서의 별 것 아닌 시덥지 않은 대화에 점점 이 사람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으니 오히려 기대되기도 했다.
"우리 뭐 먹어?"
"몰라! 뭐 먹었으면 좋겠어?"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나 한참을 맛집 골목을 돌았다. 같은 골목길을 두 바퀴고 세 바퀴고 돌았다. 옆으로 흐르던 강가의 밤벚꽃이 개울에 비쳐 반짝였다.
그즈음의 우리는 손을 잡는 게 이미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두 바퀴를 돌았을 때, 툭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비에 가방에 넣었던 접이식 우산에 두 사람의 몸을 구겨 넣었다. 자꾸만 부딪히는 어깨에 잡은 손을 풀고 팔짱을 풀고 어깨를 안았다. 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정말 좋은 냄새가 났다. 그때 아주 오랜만에 설렘이란 감정을 느꼈다.
결국 돌고 돌다가 우리는 모츠나베를 먹으러 갔다. 매운 것과 자극적인 걸 잘 먹지 못하는 그 애의 입맛을 맞춰서, 슴슴하고 담백하게 먹을 수 있는 모츠나베. 메인 식사시간보다 살짝 일찍 들어가 식당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나베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고, 우리는 카페에서 나누지 못했던 우리의 아주 작은 부분들을 공유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의 얼굴에 쓰여 있는 자잘한 정보 맞추기 게임을 했다. 너는 누나가 있을 것 같아, O형이지? 뭐 그런 것들. 혹은 우리의 성격에 대한 부분들. 나는 말을 돌려서 해,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 까봐. 나는 솔직하게 얘기해, 잘 숨기질 못해. 그러니까, 나는 네가 지금 아주 좋아, 뭐 이런 것처럼. 아랫배가 간질간질 부끄러운 감정들.
"너는 이성 볼 때 뭘 봐?"
"나 얼굴. 잘생겨야 해, 그런데 내 취향으로."
"나는? 어때 네 취향이야?"
"너는 꽤 많이 취향이야."
취향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리고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기름진 나베에 맥주는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애는 맥주를 보고 꿀꺽 침을 삼키더니, 참겠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니까 왜 차를 가져왔냐는 나의 웃음과 함께 그 애도 어색하게 하하하 웃었다.
나베는 아주 맛있었고, 따뜻했고, 서로의 앞접시에 먼저 덜어주겠다고 국자를 가지고 밀당을 하기도 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커플 짓은 다 했었다.
"에잇, 나도 한 잔만 마실래!"
"너 그러면 차는 어떡하려고?"
"근처에 보니까 호텔 많았으니까 그냥 하루 자고 갈까 싶어."
"용감하네..."
한참 나베를 먹다 보니 기름기에 속이 답답해졌나 보다. 혹은 다른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지금 와서 말하자면, 얘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고 있어도 마시지 않으며, 술이 아주 약하다. 우리 아빠랑 아주 똑-같다. 본인이 말하기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한다. 맥주를 핑계로 하룻밤 다른 곳에서라도 자고 난 다음날 아침에 나를 보고 싶었다고 한다. 별 꼴이다 정말. 그렇지만 그럼 어떤가 좀 귀여운데. 여우짓 좀 하네? 정도로 넘어갈 정도로 나 역시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 탓으로 줄어든 영업시간에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우산 하나에 두 몸을 딱 붙여 넣고, 팔짱을 끼고 서로 어깨가 젖을까 우산을 이리로 기울였다, 저리로 기울였다 했다. 또다시 좋은 냄새가 훅 끼쳤다.
"너 무슨 향수 써?"
"그런 거 잘 몰라서 안 써. 못쓰는 거에 가깝지?"
"근데 되게 좋은 냄새 나."
"그래?"
"되게 산뜻하고 좋은 냄새. 계속 맡고 싶다."
"그럼 나 너네 집 가도 돼?"
"호텔 가서 잔다며."
망설임 없이 확 들어온 질문에 나도 모르게 칼답으로 정색해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 생판 모르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를 데리고 간다고?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심지어 나는 외국인이다. 뭔가 있을 때엔 저항할 수 없고(일본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시 비자가 취소됨), 법적대응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에 한 번에 끄덕이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일본어적 표현으론 심플하게, 무서웠다.
“오늘, 오늘은... 오늘은 집에 빨래 널어놔서 안돼!”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나 호텔 앞까지만 같이 가자.”
그는 아주 산뜻하게 수긍했고, 내 손을 잡고선 네가 어떤 점이 무서웠는지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발언이 경솔했다고 사과했다. 그 말에 또 마음이 녹았다. 호텔 앞까지 손깍지를 끼고, 비는 많이 잦아들었는데도 접이식 우산 하나 아래에 우리는 몸을 딱 붙이고 나란히 걸었다.
교토 시청 앞에 자리한 커다란 호텔 앞, 그는 손을 한참을 쪼물락 거리다가 말했다.
“아까는 정말 미안. 내가 너무 경솔했어. 나, 다음에도 꼭 만나줘. 너랑 또 만나고 싶어. “
“나도 바로 정색해서 미안. 무서웠어. 네가 그런 의미 아니었던 거 알아.”
그 사람은 아주 밝게, 얼굴이 다 구겨지도록 웃었다. 그럼 됐다고 잡은 손을 몇 번 크게 휘저었다. 좋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돌려 표현하지 않았다. 느끼는 건 전부 말했고, 전부 행동으로 드러냈다.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미련 없이 손을 흔드는 그 사람이 멀어지기 전, 이대로 놓치면 우리 관계는 다시 조금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건 싫었다. 나는, 나는 이 사람과 좀 더 솔직하고 순수하게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계속 다가왔던 건 이 사람이고, 나는 그 액션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였다. 우리 사이를 좀 더 깊게 가져가기 위해선 한 발 내딛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 호텔 비싸잖아.”
“어? 너희 집? 빨래 널어서 안된다고... “
”복도에서 기다리면 치우고 들여보내 줄 거야.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우리 아직 할 말 더 남았잖아. “
“응! “
한 잔 더 하자며 집에 가는 길,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콜라와 사이다, 안주 치즈를 샀다. 쿰쿰한 빨래 냄새가 날까 복도에 그 애를 세워둔 채로 집에 온갖 좋은 향수를 뿌리고 환기를 했다. 좋은 향만 남아라, 좋은 향만 남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