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복지자격증 따기
나에게 책임질 아이가 두 명이나 생겼다. 세돌 차이로 남매엄마가 된 것이다. 딸내미는 정말로 섬세한 아이였으며 아들내미는 힘이 넘쳤다.
한동안 엄마인 나는 이중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아이 둘을 키우기는 삼십 년 넘게 살면서 겪었던 어떤 어려움보다 힘들었다. 큰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아파서 오면 둘째는 자동으로 아팠고 둘째는 중이염이 심해 돌까지 동네에서 큰 이비인후과를 매일 출석했다.
“언제 클까?
언제 둘이 알아서 집에 있을까?
언제 혼자서 밥을 척척 먹을까?
언제 알아서 옷을 다 챙겨 입을까?
혼자 언제 씻을까? “
모든 게 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돌림노래 처럼 해야 하는 육아는 나를 정말 지치게 했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둘째가 4살이 되었을쯤부터는 짬이 생겼다. 미운 네 살이라지만 어린이집에도 많이 적응을 했고 좀 사람 다워 졌다.
육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동네에서 친한 언니가 사회복지 자격증을 딴다고 같이해보자고 했다. 그래 이제 나도 무얼 다시 시작해 봐야지. 하면서 사회복지 자격증에 대해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때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장애인 학생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같이 일했던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생각이 났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지만 항상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던 세분의 선생님들.
대학교 4년 내내 봉사 활동은 이어졌다. 장애인 학생들이 소풍을 가거나 야외활동을 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봉사 활동이었다. 어려움 없이 스무 살까지 살았던 나는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는 걸 느꼈었다.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소중한 그림 같은 기억이었다. 막연하게 사회복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 번 도전해 보자 하며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관해 모든 걸 오케이라고 외쳐주는 남편이기에 150만 원이나 넘는 학비를 쿨하게 결제해 주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있는 곳까지 따라왔을 땐 신랑도 내가 포기한 것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학기에 한 번의 과제,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었다. 자격증을 따는 수업이라서 그런지 1년을 꼬박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어린이집을 가면 어김없이 온라인 수업을 들었고 과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나는 숨통이 트였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무조건 실습을 끝내야 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육아 환경에선 유치원, 어린이집 종일반이 나의 희망이었다.
나는 동네 근처 노인 복지센터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4시까지 생활을 했다. 노인 복지센터는 어르신들 어린이 집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린이집과 똑같은 일정으로 어르신들이 생활을 하신다. 중간에 봉사활동 하시는 선생님들이 오시면 같이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고 돌봐드린다. 어른들이 번호를 줄줄이 외우고 계신 노래방 시간은 매일 있었다. 매일 저녁 트로트를 연습해서 불러드렸다.
한 달 동안의 실습 기간 동안 같이 실습하던 동기들과 선생님들과도 친해졌다. 매일 아침 실습 일지도 작성하고 차근차근 사회복지사의 일도 배웠다. 또 다른 세상을 살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세상은 살아갈수록 그리고 하나씩 알아갈수록 재미나다. 내가 얼마나 더 허튼짓을 더하며 이중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실습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훗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실습을 하면서 알게 되었고 확실해졌었다.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변함이 없다.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글로 써볼게요. 끝까지 읽어주세요.)
엄마의 12년째 이중생활을 연재해 봅니다.
대문 사진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