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씨한 Jul 29. 2023

권고사직을 부탁드립니다. (2)

이래도 안 해주실 건가요.

매일매일 비슷하게 돌아가던 잔잔했던 일상이 15분가량의 통화로 흑과 백처럼 나뉘었다. 남편과 숨죽여 배를 잡고 웃어넘길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키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생소함과 동시에 거북스러움을 느꼈다. 그 단어 자체를 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일까. 나는 질문을 이어나갔고 H는 대답을 회피하며 겉도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자 얼굴에선 점점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나도 모르게 음성이 칼날처럼 변해갔다.


"선생님, 그러면 그 원어민이 누군데요?"

"원어민이요, 원어민이 한국인선생님들이랑 돌려봤어요."

"그러니까, 그 원어민이 누구냐고요."

"얼마 전에 그만둔 원어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도대체 이들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진을 어떻게 돌려봤단 말인가. 장난으로 누군가 합성이라도 했단 말인가? 왜? 무엇을 위해서? 짧은 찰나에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맸다. 의리녀 H는 끝까지 누구인지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본인은 보기 싫은 그 사진을 보게 되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H가 실업급여 800만 원에 눈이 어두워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라는 생각까지 했다. 진심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 '니 인생은 이제 끝났어'라는 식의 어투와 억양은 이 소문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야! 그 사진이 내가 아닌데 네가 어떻게 내 사진을 봤다는 거야. 내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니들이 돌려보냐고."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시죠?"

"내가 아니라잖아. 내가 아닌데 어떻게 그 사진이 있냐고. 어? 너 말해봐. 내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런 사진이 어떻게 있냐고. 그 사진이 진짜면 너 내 재산 다 가져가. 됐니?"

"아니 아니면 아니고 떳떳하다고 하시면 될 것을 왜 저한테 화를 내시죠?"


욕이 나올 뻔 한 걸 꾹 눌렀다. 얘랑 실랑이할 일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조건 그 소문을 만들어낸 범인을 잡아야 했다.

 

"네, 선생님 아니었으면 평생 모를 뻔했을 일인데 너무 고마워요. 그런데 선생님 말이 거짓은 아니길 바라요. 이 해프닝이 거짓이면 어떻게 될지 아실 거라 생각해요."

"당연히 거짓이 아니죠."

음성에 칼날을 간신히 숨기고 최대한 상냥하게 이야기를 했다.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15분가량의 대화는 끝이 났다. 끝까지 함께 웃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아무 잘못이 없고 떳떳함에도 순간적으로 남편의 표정을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불륜'이라는 건 내 평생에 있을 수도 없지만 그 상대가 하필 학원의 원장님이라는 것은 더 절망적이었다. 심지어 학원 안엔 원장님의 부인도 함께 일하고 계시는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아이는 더러운 루머를 굳게 믿고 히든카드를 내밀며 '권고사직'을 받아내려 했다고? 기가 찼다. 시간이 늦었지만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H의 전화를 끊자마자 원어민들과 가장 잘 어울리며 내가 상당히 아끼고 신뢰하는 유치부 팀장 Y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에게 방금 통화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나는 어떻게 이런 루머가 돌 수 있냐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이때까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H가 실업급여 800만 원에 눈이 멀어 쇼를 한 것이기를. 대화 끝에 정말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하니 그녀의 답변은 놀라웠다.


" 네, 원감님 실은 작년쯤 그런 이야기가 돌긴 했었어요. 그런데 사진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

" 언제? 작년?"

" 네, 그런데 모두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웃고 넘어갔었어요."


H가 완전한 정신 이상자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있기는 있었던 것이다. 심각한 것은 작년부터 시작된 소문이라는 것. 덧붙여 H는 '사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루머는 알면서 '사진'은 모른다고 하는 Y의 답변이 이상함을 감지했다. H는 분명 모두가 돌려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진이 '차 안에서의 키스 사진' 이였다. 루머는 루머로 넘길 수 있지만 H는 분명 사진을 보았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녀는 원어민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편이었다. Y도 알지 못하는 사진을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 보았다는 이야기 인가? 존재할 수 없는 사진을 말이다.

난 스스로 ' Detective (탐정)'을 자처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음속 이상한 말 한마디가 울려퍼졌다. 그냥 나도 모르게 저절로.


"Y, 넌 아니지?"


                    

사진출처: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권고사직을 부탁드립니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