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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초 Feb 26. 2024

나는 3년 차 교사입니다

2월 개학 준비 기간

겨울방학의 끝을 알리는, 2월의 첫 출근을 목전에 둔 밤이다. 평소에는 이때쯤, 그니까 새벽 1시쯤 누워 책을 잡으면 언제 잠에 든 지도 모르게 숙면을 취했다. 근데 오늘은 다르다. 자꾸 심장이 콩닥대는 게 ‘나 설마 내일 기대되나?’



교사는 매 해가 새로운 직업이다. 낙관적으로 생각하자면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허덕이지 않아도 되어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2월의 첫 출근날에는 새로운 학년을 배정받고 새로운 동학년 선생님들과 대면한다. ‘새로운 교실은 어디일까?’, ‘새로 오실 부장님, 같은 학년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한 게 넘쳐나는 밤이다. 교사가 한 해를 잘 나기 위해서는 맡는 반 아이들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중한 요소가 허다하다. 밖에서 보는 교사는 수업시간, 점심시간, 쉬는 시간이 끝이겠지만 이 외에도 교사는 더 많은 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급 운영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학생 정보를 등록하고, 서류를 처리하고, 회의하고.


교실이사

새해의 첫 출근날에는 우선 지난해의 교실로 출근한다. 29명의 아이들과 켜켜이 쌓은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내 예상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오전 10시 전교직원회의 전까지 교실 짐을 싹 정리해야 한다. 방학식날 나름 짐을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잡동사니의 행렬은 끊이질 않는다. 차마 활동하지 못한 미술 도구들, 뽑아놓고 쓰지 않은 평가 자료, 어디선가 굴러 나오는 보드게임의 일부까지. 손길이 닿지 않았던 교실 구석구석까지 우리의 시간이 뻗친 모양이었다. 자질구레한 물건을 주워 담다 보면 교실에 여백이 차오른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1년을 꽉 채워 지나온 아이들과의 묵은 기억을 담는다.


전교직원회의

새로운 교실에 나른 짐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욱신한 허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두어 번 쉬었을 때쯤인가. 전교직원회의에 가자는 옆반 선생님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벌써 10시구나. 아직 이사를 끝내지 못한 반이 많아 엘리베이터는 성행 중이었다. 덕분에 5층에서 1층까지 모든 층을 들르느라 10시 1분에 시청각실 문을 간신히 통과했다. 전교직원회의는 말 그대로 학교에 모든 교직원이 모여하는 회의다. 말이 회의지 교무부장님과 연구부장님의 교육과정 브리핑을 듣는 연수시간에 가깝다. 교감선생님께서 전입 오신 선생님을 한 분 한 분 소개하셨다. 전입교사가 무려 15명이나 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마이크까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에 힘을 실어 육성으로 소개해주셨지만 뒤까지 잘 들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인원이 많아 외우기 어려울 텐데... 사실 규모가 큰 학교는 교사들끼리도 서로 누가 누군지 잘 알지 못한다. 회식이라도 자주 있으면 모를까 회식도 1년에 환영회, 송별회 딱 두 번만 있는 터라 얼굴 익히기가 어렵다. 그렇게 머리에 잡문들이 흘러가는 교육과정 브리핑시간이 끝났다.


학년회의 겸 점심시간

쏜살같이 시청각실에서 튀어나와 엘리베이터를 잡기에 성공했다. 교실로 올라왔는데 새로운 학년부장님께서 부르신다. 우리 6학년 모여야 할 것 같다고. 짐을 다시 대충 쑤셔 넣고 연구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생경한 얼굴들이었다. 어색한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바로 학급을 뽑았다. 교사는 어떻게 반을 맡느냐? 바로 제비 뽑기다. 손 떨리는 제비를 뽑았다. ‘바’ 반이다. ‘올해도 작년만 같아라’ 속으로 빌었다. 이걸로 제비 뽑기 끝이 아니다. 학년 업무를 배정해야 한다. 학교 업무 외에도 학년에서 생기는 각종 일들에 대한 업무 분담이 필요하다. 총무, 학습준비물, 전문적 학습 공동체, 수합, 평가 등. 6학년이라 졸업 업무를 포함한 학년 업무가 물리적으로 많다. 꽤나 부담이 되는 시간이었다. 역시 뽑았다. 내가 맡게 된 학년 업무는 졸업식. 그나마 보기에 있던 선택지 중에 자신 있던 일이라 다행이었다.


짐 풀기

무질서하게 쌓아둔 짐을 드디어 푼다. 이거 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여행도 짐 싸기보다 짐 풀기가 더 고역인데 교실 이사도 마찬가지구나. 물건들을 한아름씩 들어 정리를 해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고작 3년 차에 짐이 이 정도라니.. 목이 타 물을 크게 한 컵 떠와 원샷을 했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해가 뉘엿하다. 나 아직 청소 손도 못 댔는데.. 누인 몸을 일으켜 책을 꽂아 넣기 시작하니 길이 보인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것은 교실 오른편 책꽂이에, 보건 용품은 보건복지부 사물함에. 다행히 작년과 구조가 같은 반이라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다 보니 대충 교실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됐다. 나머지는 내일 하지 뭐.’ 휘갈겨 써놓은 할 일 목록에 반도 채 줄 긋지 못한 채 교무수첩을 접었다.


어제의 콩닥대던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기대는 여전하다. 가늘게 눈을 감는다. 오늘은 어떤 아이들과 새로 맞은 해를 함께할지 고대하는 밤을 보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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