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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Jun 28. 2023

너에게 나를 보낸다.

멈출수 없는 자기 고백

 장마 전 불꽃투혼을 발휘하며 더위 속에서 연거푸 골프를 하고, 며칠 차분하게 보냈다. 군대 간 아들 방을 정리하고, 둘째 학교 다녀오면 같이 옮기라고 한 매트리스를 혼자서 낑낑거리며 지하 3층의 공용창고로 옮겼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가구들의 배치가 바뀌어져 있다는 데 나도 이제 그런 주부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노트북에 있던 예전 자료들을 정리하며 공들여 만든 이론-그런 걸 만들기도 했다-은 관심 있을 만한 후배에게 공유하고, 미뤄뒀던 보험정리도 마무리했다.


 그러다 94년 겨울, 대학 졸업 무렵에 썼던 글 한 편을 발견했다.

 



 내가 읽은 가장 재미있는 책은?

 글쎄, 최근에 읽었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가슴 시리게 읽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때 자율 학습을 땡땡이치고 만화방에서 읽은 '외인 구단'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내게 가장 재미있는 책은 일기장이다. 그것도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그렇다고 내가 남의 일기장 훔쳐보는 걸 무슨 취미로 삼는 사람은 아니다. 사과 중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가 '훔친 사과'이듯, 몰래 훔쳐보는 일기는 그 사과의 맛처럼 달콤, 새콤, 그래서 달고 때론 눈물도 난다.


 지금은 학교에 없는 나의 친구

 잡지사에서 기자질을 하고 있는, 내가 늘 도색작가라 부르는 그 친구가 복학 후 도서관에서 한 일이라고는, 앞에 앉은 여자 이마 쳐다보기, 가끔 짧은 치마 입은 여자 허벅지 관찰하기, 영문과를 다녔지만 전공과 무관한 소설책, 시집 따위 읽기, 그러다 졸리면 잠깐 엎드려서 몇 시간이고 푹 자기, 저녁때면 후배들 꼬셔 슬슬 술 마시러 나가기..., 여하튼, 그 친구 스스로도 '나보다 도서관에서 쓸데없는 짓 많이 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할 정도로 한심한 녀석이 내게는 무심한 일상에 포카리스웨트 같은 에너지를 제공했다. 바로 그 녀석의 일기장 (그는 그걸 일기장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너덜너덜한 관념의 파편들을 적어 놓은 낙서장이라고 했다.)을 훔쳐보는 일!


 처음 그 녀석의 일기장을 훔쳐볼 때

 녀석이 수업을 가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열람실에 책 보러 갈 때가 그 낙서장을 볼 수 있는 찬스였다. 그러다가 미처 다 보지 못했는데 그 녀석이 돌아와 현행범으로 붙들리면, 처음엔 '넌 눈이 멀게 된다.'는 저주와 함께 화를 낸 적도 있지만, 나중엔 내 뒤통수를 한 대 치며 한마디 하고 말기도 했다. "개새끼!"


 어느 때는 그 녀석의 일기장을 봤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또다시 개가 보고 있다!’ 그리곤 진지하게 화를 낸 적도 있다. 남이 읽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하고 쓰는 자기 고백이 얼마나 솔직할 것이며 그 낙서가 또 너에게 얼마나 재미가 있을 수 있겠니? 넌 영화 주인공도 아닌데 누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 '그 짓'을 할 수 있겠냐?' 나는 다시는 안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좀 더 은밀하게 훔쳐보는 일을 하곤 했다.

 그 후로도 그 녀석은 제 노트에 낙서하는 걸 쉬지 않았고, 나 또한 몰래 훔쳐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장님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의 노트에는···

 내가 염치 팽개치고 그 노트에 집착한 건 처음엔 그 녀석의 성도착증적인 雜글들 때문이었다. 가령 가슴 뭉클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슴속 스미는 감동이 연상되지 않고 관능적인 여인의 몸이 생각난다는 둥, 또 한 때 '세계화'가 유령처럼 떠다니던 때의 녀석의 노트에는 '세계화, 세계화하는데 문제는 관념화된 허상으로서 세계화가 아니어야 한다는 거지. 뭐냐면 질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거야. 질의 세계화...'


  내가 그 녀석의 노트를 본 것은 물론 심심해서 시작한 장난이지만, 차츰 그 녀석의 일기장을 보며 그의 솔직한 내면과 꿈과, 좌절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녀석이 자기 일기를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내게 공개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 마음을 열려는 미끼였고, 또 다른 이유는 그러니까 보여 줄 만한 건 보여주고 정작 자신의 고민에 찬, 고민이 담긴 글을 따로 적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녀석이 따로 차곡차곡 몰래 써놓은 글은 그 녀석 마음속에 있었다.


 멈출 수 없는 자기 고백

 우린 서로를 서로의 일기장이라 불렀고 차마 일기장에도 쓰지 못하는 비밀(?)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 녀석이 졸업을 하고 난 뒤 우리의 숨 막히는 숨바꼭질은 끝이 났다. 나 또한 나의 고백- 때로 고해성사처럼 경건했던-을 멈추었다.

 하지만 요즘도 내 속에 얘기가 쌓이고 쌓여 술로도 어찌할 수 없을 땐 그 녀석을 찾는다. 그리고 때로 그 녀석의 마음속 낙서들이 보고 싶을 때면 녀석을 불러 술로 꼬시곤 한다. 세종문화회관 뒤에 '가을'이라는 카페는 우리들의 또 하나의 일기장이 되었다. 술이 한 두어 잔 들어가면 그 녀석은 스스로 마음속 낙서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마치 여민 가슴을 풀어헤치는 젊은 아낙처럼, '이러시면 아니......'


 우린 얼마나 외로운가!!

 난 가끔 그 녀석이 없었다면 어떻게 대학 생활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한다. 사람에게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큰 축복인가에 늘 감사하게 된다. 하여, 그 녀석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낸다. 그 녀석은 지금도 컴퓨터 앞에 앉아 깜박거리는 커서를 보며, 외로움을 삭이며, 열심히 쓰고 있을 거다. 너덜거리는 관념의 파편들을.




 그 친구는 지금은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책을 여러편 낸 작가님이 되었다. 한 번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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