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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Sep 03. 2023

두 개의 자, 세 개의 눈

회사생활의 팁

보고를 마치고 상사의 방을 나오려는데 상사 분이 나를 멈춰 세우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던지듯 한마디 하신다.

“음.. 강상무! 니 일은 잘하는데 밑에 직원들한테 좀 하쉬하게 한다카던데… 그라지 마라. “


이어 몇 마디 더 조언이 있었고, 나는 어떤 상황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 적당한 대답을 못한 채 알겠습니다라는 답변만 하고 그 방을 나왔다.


 그 말씀이 귀에 맴맴 돌며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즈음 회사는 구조조정이 예고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회사는 큰 폭의 조직개편이 있었고, 조직은 축소되고 직원뿐만 아니라 임원 상당수가 계열사로 전출을 가거나 일부는 비자발적 퇴사를 했다.


 두 개 층에 나뉘어 있던 우리 조직은 한 개층으로 헤쳐 모였고, 내가 있었던 11층은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몇 명의 직원들이 남아 있었다. 나도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아 무보직 상태로 한 달여를 보냈다. 텅 빈 사무실에서 그동안 썼던 수첩들을 옮겨 적으며 하루를 보냈다.


 술에 취해 아내에게 ‘나는 사약을 먹기엔 너무 어려서 유배를 가게 될 것 같다’ 정도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막막함이 지금도 만져지는 듯 생생하다.


 그러면서 계속 곱씹어 생각하고 생각했다. ‘내가 왜? 무엇이 잘 못된 것일까?’


 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직원과 논쟁을 하다 마땅한 대안도 없이 리스크만 강조하며 반대하는 후배에게 ‘이미 결정된 일이니 그냥 하라’며 버럭 화를 내고 대화를 마무리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주위에 몇 명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말을 전하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또 하나 공동프로젝트를 하는데 자기 팀의 일을 슬쩍 떠 넘기는 선배에게 미리 선을 그으며 선배 임원분을 섭섭하게 했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당시 회사를 쥐락펴락하던 엄청난(?) 분이 있었는데, 나는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소극적 동참으로 반대를 하며 이미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의 윗선(?)에게 ‘사업은 모르고 숫자만 아는’ 사람이라며 비난을 했을 테고 그의 조직 내 위상 등에 미뤄 나를 감싸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조직 개편을 준비하며 한 명 한 명이 도마 위에 올려졌을 때 이런 에피소드들은 나를 버릴 이유로 충분했을 것이다. 원래 조직은 장점으로 사람을 쓰지만, 버릴 때는 단점을 얘기하며 버린다. 단점 때문에 버려진다기보다 단점을 버리는 이유로 사용하기 마련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의 미숙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기준과 타인 혹은 세상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산업 경험도 없고 직무 경험도 없었던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를 하며 <쫄지 말고, 스스로 당당하기>를 다짐했었다. 당당하게 나의 일에 몰입하기가 전부가 아님을 이때 처음으로 자각했다. 스스로 당당하게 나의 소신을 지키고자 했으나 나의 기준과 당당함은 때로 타인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고 독선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미성숙이 누군가에 상처를 줬을 수 있었다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세상이치를 나이 사십이 다 되어 느낀 것이다.


 수첩에 “두 개의 자, 세 개의 눈”이라고 메모했다.


 회사는 유리알  같은 곳이다.

 회사야말로 평판사회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소문이 나고 누구나 알게 된다. 요즘은 온갖 SNS툴들이 있으니 더하며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유리알 속에 나를 보고 있으며, 호의와 이해 속에 봐주는 이도 있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보는 눈, 그저 무덤덤하게 보는 눈이 있다. 나의 평판은 내 행동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인식의 결과물이다. 그 인식을 결정하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내게 호의적이고 이해와 배려로 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평판은 나에게 비판적이거나 경계하는 이들에 의해 더 많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 평판은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나의 기준과 당당함이 나를 규정하는 게 아니다. 나의 태도를 지켜보는 타인의 인식이 나를 규정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명심보감에 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라는 말이 있다. 한 번의 분함을 참으면 백일의 근심을 던다라는 뜻이다.

 화를 내는 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금방 내 속은 풀릴지 모르지만 차근차근 설명할 때보다 결과가 나아지지 않는다. 화를 내본들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바뀐 척은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마음의 간극만 생길 뿐이다. 그런 면에서 화를 내는 건 효과성면에서 ROI가 아주 낮은 행동이다. 또 다른 부작용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면 적을 만들 수 있다. 사내 정치의 핵심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너무 자주 화를 내면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보지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면 바보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화를 내야 할 때도 있다. 특히, 리더의 화내기는 조직에 던지는 메시지다. 강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화를 잘 내는 건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쉽지는 않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버럭질 하는 후배가 있었다.  어느 해는 상황적으로나 능력이나 확신한 임원인사에서 누락되었다. 후문으로 들으니 평판조회에서 문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본인의 승진 누락을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있는 걸 보니 본인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노련한 선배님도 계셨다. 화를 내시는 건지 경고를 하는 건지 그 중간쯤의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구사하셨다. 사무실로 불러 갔는데 '강철구님, 팀 이름이 머였더라'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물으시면 ’아 내가 뭔가를 잘 못하고 있구나 ‘ 생각하게 된다.


 회사는 미션의 조합일까? 작은 사회일까?

 당연히 회사도 사회다. 관계와 평판이 회사 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똑부러지게 일만 잘해서 인정받는 건 아마 과장정도까지가 아닐까.


 그 후 “두 개의 자, 세 개의 눈”이 적힌 작은 액자를 몇 년째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지금은 그 문구가 “매일이 소풍이다”로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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