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근원은 미운 너였다 11화

미워하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묶여 있었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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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를 잊었는데도, 왜 여전히 그 생각이 날까”


이젠 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옷을 즐겨 입었는지도 가물가물하고,
그가 즐겨 쓰던 말투도,
기억하려 애쓰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다.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연락도 끊겼고,
그의 일상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공통의 지인도 이젠 없다.
시간도 충분히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 한구석은 아직도 무겁다.


그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문득,
감정의 끄트머리에 그가 있다.


아무 상관없는 말에 울컥하고,
비슷한 장면에서 가슴이 쿡 찌릿하고,
어떤 눈빛이나 표정에서
이유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젠 끝났는데,
왜 아직도 나를 흔드는 거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분명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 감정은 끝나지 않는 걸까.
왜 나는 여전히 이 감정의 일부를
그에게 붙잡혀 있는 듯 느끼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 어디서 뭘 하든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 안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자꾸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몸은 떠났는데,
감정은 그대로다.
행동은 끝났는데,
내 안의 해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애써 외면했고, 잊으려 했고,
괜찮은 척도, 무관심한 척도 해봤다.


그런데 가장 끈질기게 남아 있는 건
미움의 감정이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 아래엔 늘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그렇게 당했을까’,
‘왜 그 사람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놓여 있었다.


나는 분명히 잊은 줄 알았지만—
그 감정 안에서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살고 있었다.



2절.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나를 묶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잊지도, 이해하지도 않을 거야.”
“그 사람이 잘못한 건 분명했고,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선 잊지 못하게 할 거야.”


그 다짐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방어막이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분해서—
그 감정을 어떻게든 다스리려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게 나를 강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한 분노가 나를 다시 일으키는 에너지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을 향한 냉소가 내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무거워졌다.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미워하겠다고 다짐한 감정이 나를 더 깊이 묶고 있다는 걸
점점 알게 됐다.


나는 그 사람을 벌주기 위해
미워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가 입은 상처가
너무 허무해질까 봐.
그를 용서해 버리면
그 모든 날들이
의미 없던 것처럼 느껴질까 봐.


나는 그에게 머물렀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당했던 걸 잊지 않기 위해.


그런데 그게,
내가 그 사람에게 매인 방식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게 아니라,
그 감정 안에 나를 묶어두는 족쇄였다는 걸.


나는 계속 그 사람 곁을 맴돌고 있었다.
기억으로, 분노로, 원망으로.
그 사람은 이미 떠났는데,
나는 아직도 그 감정 속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를 잊기 위해,
나는 계속 그를 떠올려야 했고
그를 미워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와 대화해야만 했다.


그렇게 보면—
진짜 떠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른다.



3절.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어느 순간,
진짜 문제를 알았다.
그를 놓아주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나를 놓아주는 게 두려웠던 거다.


미움은 내 상처를 증명해 주는 표식 같았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내가 얼마나 견뎌왔는지,
이 미움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 감정을 놓으면
마치 내 고통까지 지워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럼 나는 괜히 힘들었던 건가?’
‘그 시간은 다 무의미했던 건가?’
그게 무서워서,
나는 미움을 계속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나는 그 사람을 벌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 아픔을 잊히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감정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그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그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그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끊어내는 것.
그에게 매달린 나를 구해내는 것.
그게 진짜였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매이지 않고 싶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 남은 감정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4절. 용서는 그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착각했다.
용서는 그를 위한 것이라고.
그를 이해해 주고,
그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더 싫었다.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용서는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미움은 이상하게도 기억을 붙잡는다.
그날의 말, 표정, 태도를
계속 되새기게 만든다.
잊으려 할수록 더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그렇다.
미움은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고정시킨다.
마치 내 삶의 재생 버튼을 누른 듯,
그 장면을 끝없이 반복시킨다.


나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매일 그와 함께 살았다.
이미 끝난 장면을
내 감정이 매번 다시 살려냈다.


그러니 결국,
용서는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게 아니었다.
나 자신을 그 감정의 루프에서 풀어내는 일이었다.


용서한다는 건
그가 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기억을 붙잡고 있던 내 마음의 손아귀를 푸는 것.


나는 이제 알겠다.
내가 미워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감정에 묶여 있던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니 용서란,
그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살리는 선택이었다.



5절. 진짜 용서는, 내가 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알겠다.
용서는 그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그의 잘못을 가볍게 덮어주거나,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의식도 아니다.


진짜 용서는,
내가 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미움 속에서 살았다.
미워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라
싸우는 사람인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끝나고 나면
남는 건 늘 공허함뿐이었다.
결국 나는,
나를 소모하면서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나갔다.
그 사람은 내 삶의 현재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를 내 감정의 중심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미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나는 더 이상 거기에 묶여 있지 않겠다.”


용서는 잊음이 아니다.
잊으려 하면 더 선명해진다.
용서는 오히려 기억을 품고도
그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일이다.


그 선택은 결국,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내 감정이 흔들리는 인생이 아니라,
내 감정을 내가 다스리는 삶.


나는 이제야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워하는 나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진짜 용서는 그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가 나를 구하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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