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작동은 시작되었다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말하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여전히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날이 있고,
아무 일도 없는데 기운이 빠져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찾아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도 버텨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날도 여전히 있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상태가 왔다고 해서 삶 전체가 멈추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불안한 채로 하루를 시작해도,
무기력한 감정을 안고서도,
나는 여전히 이를 닦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섭니다.
그전의 나는 달랐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모든 걸 포기해 버렸고,
감정이 무너지면 삶 전체가 같이 무너졌습니다.
불안은 곧 정지였고,
무기력은 끝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감정이 흔들린다고 해서
내 삶의 기능까지 모두 멈출 필요는 없다는 것을요.
완전히 고쳐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서툽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이 완벽해질 때,
불안이 사라질 때,
다시 시작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괜찮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고,
불안해도 움직일 수 있으며,
완전하지 않아도 삶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고쳐지는 중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제는 멈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감정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삶이 완벽해지기를 미루지 않고,
지금의 상태로도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
이건 완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재작 동입니다.
나는 아직 불안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예전과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움직이고 있다.”
이 문장을
이제는 부정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나는 회복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완전히 괜찮아지는 것.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상태.
불안도, 무기력도, 감정의 요동도 사라진 단단한 나.
그래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아직 멀었다”,
“나는 여전히 고장 났다”라고 판단했습니다.
회복은 언제나 미래에 있었고,
지금의 나는 늘 부족한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회복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요.
회복이란, 다시 작동이 가능해진 상태입니다.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져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갖는 것.
그게 회복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감정이 무너지면
그날은 끝이었습니다.
하루 전체가 무효가 되었고,
스스로를 향한 실망이 쌓여
다음 날까지 끌고 갔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여전히 감정이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지는 않습니다.
불안한 상태로도 일을 하고,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도 사람을 만나고,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그대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이건 대단한 변화입니다.
눈에 띄게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회복되었다는 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망가졌을 때,
그걸 인식하고
다시 연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고장이 나면 끝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장이 나도,
“아, 지금 회로가 잠시 멈췄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다시 시동을 걸 방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재작 동입니다.
완벽하게 고쳐진 기계가 아니라,
오래된 기계라도
점검하고, 식히고,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상태.
나는 지금 그 상태에 있습니다.
여전히 소음은 있고,
여전히 불안정한 순간도 있지만,
삶은 다시 순환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작동 중이다.”
이 한 문장이
지금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예전의 나는, 고장에 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무너지면,
그건 곧 실패였고
실패는 곧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조금만 감정이 흔들려도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직행했고,
한 번 멈추면
다시 움직일 수 없을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래서 늘 버텼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고장 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그 버팀은
결국 더 큰 고장을 불러왔습니다.
예전의 삶은 이랬습니다.
무너질까 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실수할까 봐 감정을 숨기고,
감정이 올라오면 더 세게 눌러버리는 방식.
그러다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버렸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때의 나는
‘쉬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복구 방법을 모른 채
그냥 정지해 있었던 겁니다.
고장이 나면 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고장을 인정하는 순간
삶 자체가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더 숨겼고,
더 버텼고,
더 무너졌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약해서 멈춘 게 아니었습니다.
고장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결국 모든 회로가 한꺼번에 꺼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더뎠던 겁니다.
고쳐야 할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고쳐도 된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망가질 때도 있지만,
그게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고장이 나면
“아, 지금 잠깐 멈췄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듭니다.
예전에는
무너지면 끝이었습니다.
지금은
무너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차이가
내 삶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고장 난 게 아니었다.
단지, 복귀라는 개념을 몰랐을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완전해져야만 살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나를 옥죄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스스로에게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이 정도로 안정되면 그때 움직이자.”
“이만큼 고쳐지지 않으면 아직은 아니야.”
그 조건들은
나를 보호하는 기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삶을 미루는 이유였습니다.
완전해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믿음은
결국,
불완전한 상태의 나를
삶에서 배제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회복의 과정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삶은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아니,
대부분의 삶은 늘 불완전한 상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감정이 출렁이는 날에도
해야 할 말은 할 수 있고,
불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도
작은 선택은 가능했습니다.
예전의 나는
불안하면 멈췄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모든 걸 미뤘습니다.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불안한 채로 말하고,
흔들리는 채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삶의 질을 바꿨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허용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 상태의 나도
살아도 된다”는 허용.
그 허용이 생기자
삶은 갑자기 쉬워지지 않았지만,
덜 무서워졌습니다.
망가질까 봐 움츠러들지 않아도 되었고,
다시 고쳐질 수 있다는 전제가 있으니
실수조차 이전만큼 치명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불완전함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완성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작동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감정이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상태를 안고 오늘을 사는 연습.
이 연습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확실히 나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도 고쳐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완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예전의 나는
하루를 돌아볼 때 늘 같은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오늘은 왜 이것밖에 못 했을까.”
“또 제대로 해낸 게 없네.”
“나는 왜 이렇게 느린 걸까.”
하루를 평가하는 기준은 늘 부족함이었고,
그 기준 앞에서 나는 매번 탈락자였습니다.
하지만 회복의 방향을 바꾸면서
하루를 바라보는 질문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나는 언제 작동했는가.”
거창한 성취를 찾지 않습니다.
대단한 결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멈추지 않았던 순간,
다시 돌아왔던 순간,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지만
결국 세수를 하러 갔던 순간.
메시지를 보내기 망설이다가
짧게라도 답장을 눌렀던 순간.
하기 싫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진 못했지만
아예 외면하지는 않았던 시간.
그 모든 것이
‘작동한 하루’의 증거였습니다.
예전의 기준이라면
그런 순간들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압니다.
삶은 완성도로 작동하지 않고,
연결로 작동한다는 것을.
내가 나와 연결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그날은 이미 살아 있었던 하루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말은 무엇이었는지.
“그래도 괜찮아.”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해.”
“다시 하면 돼.”
오늘,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주 작은 뿌듯함,
잠깐 스친 안도감,
조금 남아 있던 호기심.
그리고 오늘,
완벽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고 느껴졌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이 기록은
나를 채찍질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확인합니다.
“아, 오늘도 작동했구나.”
이 확인이 쌓이자
삶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돌아왔습니다.
망가져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신뢰.
멈춰도 다시 연결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이제 나는
하루를 잘 살았는지보다
하루가 작동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느려도 괜찮습니다.
오늘의 내가
한 번이라도 다시 움직였다면,
그 하루는 이미
회복 중인 하루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하루들을
하나씩, 조용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회복을 이야기할 때,
나는 한동안 이 질문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디쯤 왔을까?”
이 질문은
자칫하면 또다시 나를 평가하고,
부족함을 들추고,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밀어붙이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질문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회복은
도착 지점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질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완전히 고쳐진 상태는 아닙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가끔은 무기력에 다시 발이 잡히고,
예전의 방식이 고개를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붙들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점검 질문은
나를 다그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다시 삶 쪽으로 불러오기 위한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회복되었는가?
이 질문은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멀리 왔느냐”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묻습니다.
지금의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인가.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의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완벽해질 준비가 아니라,
망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흔들릴 수 있고,
다시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선택을
내가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나는 작동한 상태였는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예, 아니오로 나뉘지도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나를 돌보았는지,
한 번이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조금이라도 삶 쪽으로 움직였는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회복은
완성된 모습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다시 작동하려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나는 아직 고쳐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분명히 작동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이미 회복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