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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un 12. 2024

좋은 할머니 되긴 글렀다

훈이가 쏘아 올린 57점

 "할머니! 훈이가 학교에서 수학시험을 보았는데 57점을 았어요."

"뭣이라고!"

"57점!"

"그게 정말이야!"


 4학년 윤이가 이 일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는지 이르듯이 소곤소곤 말해줍니다. 아~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구나 싶었지요. 그러지 않아도 집에서 예습용으로 하고 있는 온라인 학습을 대충 하고 점수도 엉망이고 틀려도 고치지도 않았다며 딸이 걱정을 하던 차였거든요. 그 소리를 듣고 문제를 집중해서 풀고 틀리면 반듯이 다시 풀어야 한다고 일렀건만 이미 늦어버린 거였지요.


 얼마나 속상하던지요. 너희 형제 건강하고 공부도 뒤떨어지지 않게 했으면 했는데 57점이라니 기운이 쭈우욱 빠졌습니다. 어떻게 57점이 될 수가 있느냐는 나의 한숨에 우리 훈이 대답이 더 가관입니다.


  "우리 반에 10점도 2명이나 있어요."

 "100점도 2명 있지만 거의 다 못해서 다음 주에 선생님께서 재시험 본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시간이 모자라서 4문제나 못 풀어서 그래요."


 풀이 죽기는커녕 생글생글 웃어가며 심각한 구석이라곤 일도 없이 조잘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면서 어이가 없었지요. "훈이야! 시간 안에 문제 풀기를 마쳐야 하는 것도 시험이고, 네가 아직 그런 시험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풀다가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일단 체크를 해두고 다음문제를 다 푼 후에야 그 문제를 풀도록 하렴. 그럼 훈이에게 쉬웠을지도 모를 남겨진 문제가 아깝지 않겠지."


  그건 그럴 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뭐 중요할까. 57점이 뭐가 문제냐는 듯 해맑기만 합니다. 그래 이제 겨우 2학년, 세상 걱정 없는 네가 뭔 죄가 있겠니 싶었지요. 이 상황에서 훈이에게 뭔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나 싶어 딸과 통화를 했습니다. 아직은 학원을 보내기는 그렇고 수학문제집 한 권을 준비해서 풀기로 했습니다.


 재시험 때문에 다음날부터 바로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지요. 처음부터 풀다 보니 곧잘 풀기에 집안일을 하며 혼자 하게 두었는데 나중에 채점을 하다 보니 또 한숨이 절로 납니다. 분명 아는 문제일 텐데도 앞의 문제를 따라서 대충 한 것이 표가 납니다. 결국 집중해서 문제를 읽지도 않고 이해도 없이 풀었다는 것이지요. 앞의 문제가 1이 커지는 수라고 뒤의 문제는 10이 커지는 수임에도 그대로 해버린 거죠. 이 문제 다시 하라 했더니 헤헤 웃어가며 "내가 왜 그랬지" 하며 얼른 고칩니다.


 그뿐이면 다행이게요. 군데군데 문제도 빼먹고 풀지도 않았어요. 더 이상 손자들 학습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톡을 남겼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주말에 훈이 좀 신경 쓰라고요. 우리 딸 천하태평입니다. "엄마 윤이도 그때는 그랬어"  그래 그럼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4학년 윤이는 학기 초 평가시험에서 올백을 아왔거든요. 그래도 지금 훈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공부방법을 모를까 봐 조바심이 쉽사리 가시지가 않았어요.




  우리 이 저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다며 시험지를 내밀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정확한 점수는 생각나지 않지만 내 자식이 이렇게 공부를 못하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었습니다. 당장 교보문고로 달려가 문제집을 사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수학책과 수학익힘책 2권의 문제들을 노트에 그대로 필기하여 처음부터 다시 풀기 시작했지요. 너무 믿었었나 봅니다. 굳이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설마 그렇게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그때부터 공부에 대한 발동이 걸렸지요.


 두 아이를 데리고 공부하다 나중에는 근처 작은아이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졸지에 수학과외선생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공부방법을 터득해 가고 다른 과목은 몰라도 수학만큼은 기본부터 잘 다져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영어도 꾸준히 방문학습지를 하고 있었고요. 그 때문인지 다른 과목이 조금 뒤지라도 영어, 수학점수가 상위권으로 대학을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딱 그 짝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진도에 맞추어 시간 나는 대로 문제집도 풀게 해야 하고 제가 할 일이 또 늘었네요. 되도록이면 아이들 학습문제까지는 개입을 안 하려고 했어요. 지난 방학에 본인이 선택한 과제로 복습차 문제집을 풀다 보니 손자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고 감정만 나빠져서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그저 맛있는 거 해주고 예뻐해 주고 그런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은데 공부라는 것이 그 길을 가로막네요. 아무래도 좋은 할머니가 되기는  글러먹은 듯싶습니다.




 재시험을 보고 온 훈이가 드디어 백점을 아왔습니다. 백점까지는 기대를 안 했는데 떡볶이가 먹고 싶은 것이었는지 식구들의 반응에 놀랐는지 결과는 예상을 훌쩍 넘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 때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풀었는데, 재시험에서는 약간 두근거리고 집중해서 풀었어요. 떡볶이도 먹고 싶었고요."


 훈이 첫 번째 시험과 재시험 볼 때의 차이가 어떠했느냐는 질문의 대답이 훈이가 백점을 맞은 비결이 된 셈입니다. 할머니가 시험 잘 보고 오면 맛있는 거 뭐해줄까 했더니 학교 앞에 있는 튀김가루가 듬뿍 뿌려진 떡볶이가 먹고 싶다 했거든요. 좀 치사하지만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으로 응원을 해주는 것이었으니 바로 사러 갔지요. 떡볶이에 어묵에 팝콘치킨까지 사들고 와서 셋이서 조촐한 파티를 하면서 잠시 훈이의 57점으로 이렇게 또 웃으며 세월이 가는구나 싶었습니다.


 아직 아이들의 마음은 푸르고 순수합니다. 작은 것에 웃고 행복해하고, 작은 것에 주눅이 들고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앞니가 빠져 한창 귀여운 훈이가 해맑게 자랄 수 있도록 더욱 많이 칭찬해 주고 안아주면서 손자들과의 소중한 나날들을 예쁘게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아무리 더 자라도 할머니 눈에는 언제나 작고 사랑스러운 세 꼬맹이 윤이, 훈이, 천사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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