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코 끝에 느껴지는 바람 냄새가 바뀌자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먼저 알아차렸다. 기일을 깜박해 엄마가 꿈까지 찾아왔던 날이 최근 일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고 중얼거리며 추도 예배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친정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10월 25일이지?”
“그래? 난 23일로 알고 있는데.”
불효녀는 이번에도 틀렸다. 엄마가 다시 꿈속에 나타나 내 머리를 콩 쥐어박는 상상을 해본다. 내년이면 벌써 10년인데 기일 하나 제대로 못 외우는 나는 그저 접시에 찰랑거리는 얕은 기억력을 가진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망각하고 싶은 걸까.
오빠와 통화한 날, 오랜 기간 예약을 걸어놓은 조승리 작가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빌려왔다. 퇴적층처럼 쌓인 피로가 지방을 가득 품은 몸을 사방에서 짓누르고 있어 무조건 일찍 자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날이었다. 책 읽다 보면 금세 잠들겠다 기대하며 빌려온 책을 꺼냈다. ‘지랄맞음‘이라고 속 시원하게 내뱉는 작가의 쿨함이 아직도 더운 초가을 밤을 식혀주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고도 이내 나는 우주 한 공간에 부유하는 한 톨의 먼지처럼 시간의 흐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존재로 변했다. 작가와 동향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주 등장하는 충청도 사투리에서 친밀감을 느끼며, 작가 어머니의 과격한 표현에 그 시절 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렇게 새벽 2시가 되어 마지막 장을 닫았고 좀처럼 우는 법이 없는 나는 어정쩡하게 한쪽 눈에서 눈물을 내보냈다.
“나는 부모에게 부끄러운 자식이 되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솔직히 그때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엄마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엄마를 사랑했고 연민했지만 증오하기도 했다. 엄마의 애정을 갈구했고 그걸 드러내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러면 내 자신만 비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나를 부끄럽다고 했던 날들이 있었다. 백 점짜리 시험지를 가지고 올 땐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나, 떨어진 성적표를 들고 온 나는 부끄러운 자식이 되었다. 등수로 점철되는 삶을 사는 게 지겨워 밑도 끝도 없는 반항도 해보았으나 발버둥 칠수록 존재감만 더 옅어질 뿐이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이 무엇일까 나는 늘 헷갈렸다.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더 높은 성적을 바랄 땐 머리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한창 반항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때, 생활비 빠듯하다고 한숨 쉬는 소리를 듣고도 소풍이라며 새 옷을 사달라고 어처구니없이 당당한 요구를 해대는 나에게 등짝 한 대 날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지만, 결국 늦은 밤 동대문에 데려가 이것저것 입혀봐 주며 이쁘다 말해준 엄마를 사랑했다. 성적이 떨어진 나에게 향한 도끼 같은 엄마 눈은 뼛속까지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고, 온전히 서있던 엄마를 마지막으로 봤던 인천 공항에서 열고 닫히는 게이트 앞을 서성이며 한 번이라도 더 딸을 보려는 엄마의 눈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남은 몸에는 엄마의 투박한 사랑이 온기처럼 남았다. 분명 미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랑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이 없어진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길 10년이나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아무 기회도 주지 않고 엄마는 끝까지 말없이 떠났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화해의 기회도 함께 떠났다. 그렇게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죄책감만 해 질 녘 그림자처럼 길게 내 몸에 달라붙어있었다. 함께한 시간을 상자에 넣어 쉽게 열어 볼 수 없는 곳에 묻어두었다. 떠올리며 행복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도록.
부모가 되고 난 후 점수의 높낮이에 따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늘고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마음으로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지도. 부모의 면도날 같은 모진 말과 바윗덩이 같은 압박은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조승리 작가는 자라며 축하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당연히 꽃다발도 받은 적이 없고. 시력이 점점 떨어져 다녔던 시각장애인 고등학교 졸업식에 여러 상을 받으며 졸업했지만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필 그날 굳이 굿을 하고 온 그의 엄마는 서운함을 드러낸 딸과 말싸움을 하며 소리쳤다. “야! 병신 학교 졸업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그게 자랑거리냐고?” 울며 창피하다 소리쳤던 엄마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훗날 저자는 글쓰기 공모전에서 수상 한다. 이번에는 내 일처럼 기뻐하며 휴가를 내고 시상식에 따라오겠다는 지인, 큰 꽃다발을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활동 지도사 선생님, 그리고 수많은 꽃다발들이 함께였다. 그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그동안에는 엄마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늘에서 해야 하나 하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내 안에 상처받은 아이는 치유할 기회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할 거라고 믿었다. 책을 읽으며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던 내 마음이 느슨해졌다. 빙산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얼어붙은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순간들을 켜켜이 쌓아 올려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는 축제로 만들어버린 조승리 작가처럼, 나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를 기꺼이 살아내는 삶을 살고 싶다.
부족한 점이 많아 여전히 넘어지고 구르고 무릎이 까지는 일상들로 가득하지만 하루하루 그럭저럭 괜찮게 흘러간다. 행복하냐고 누가 물으면 행복이 뭔지는 몰라도 불행하지 않은 거 보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답하겠다.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순간들도 있다. 절망의 연못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지만 내 삶의 '지랄맞음'이 쌓여 지금의 나는 축제를 열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였다.
엄마와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거나 난 상처받은 영혼이네 하며 질질 짜는 대신 하루하루 축제를 여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럼 내년부터는 10월 23일을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