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리누리 Mar 02. 2023

기후정의 자작곡 <나무야>

그리고 뒷이야기

  


나무야 내 말 들리니

그래 너 말야 깜짝 놀랐니

너를 부르는 목소리 오랜만이니


이렇게 네 곁을 빌려 쉬어갈 때마다

넌 무얼 받았니

베이고 불타고 아프고 외롭지 않았니

아낌없이 주는 너


어린 시절 동화 얘길 기억하니

밑동만 남은 너의 모습에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어디로

나 어느새 변해버렸네


동화 속 결말은

인간만의 거짓된 행복일 뿐이야

우리도 너의 행복한 쉼터가 되어줄래


아낌없는 맘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말아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꺼내서 표현해봐요

내일이 막막해도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요

살아가는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말아줘요


서로란 실뜨기 놀이 같기도 해요

서로란 말은 주고받는 것이에요

서로란 함께 만들어가는 거예요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내가 학창 시절 배운 내용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환경 보호’에 대한 지문을 종종 다루게 된다. 그러나 에어컨과 선풍기를 켜지 말고 손부채질을 애용하자는 따위의 문장들을 내려다보는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없다며 냉소하고 코웃음을 치고, 결국 저들을 괴롭히는 시험 범위의 일부인 고리타분한 이야기 이상으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이들의 잘못일까. 글쎄,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도리어 십 년이 훨씬 지나도록 교과서 내용은 그대로 머물게끔 상황을 바꿔내지 못한 어른으로서 몹시 부끄럽다. 생태계의 중요성을 깨닫자는 형식적인 주제를 거듭 강조하는 내내 참 민망하고 면목이 없다.


더불어 문학 작품을 가르칠 때 자연을 ‘의인화’하는 표현을 어떠한 방향으로 전달해야 적절할지 매번 고민이 된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워하는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편리한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결국 인간의 관습화된 편의주의와 다름없다면, 달리 말해 생태계를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방식에 불과할 테니까. 아이들이 필수 교육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작품들을 연구하다 보면 그러한 문제의식을 꽤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정작 그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돕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채, 의인화란 그저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라고만 결론을 내리는 주된 해석을 볼 때마다 답답해진다. 십 대 시절은커녕 이십 대가 다 지나가도록 누구도 내게 이를 주의 깊게 지적해주지 않았으니, 적어도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답습하기 싫다. 무신경하고 부끄러운 어른으로 남고 싶지 않다.


이 노래를 쓰는 과정에서 되짚은 기억은, 그처럼 뒤늦게라도 반성이 필요해진 순간들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오랜 문장에 나는 여전히 얼마간 위로를 받는다. 특히 중고교 시절의 권장 도서이자 필독서였던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오랜만에 다시 읽고 곡의 제재로 다뤘는데, 새삼 낯설게 다가온 몇몇 구절이 있다.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41p) …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는 자기의 집을 지으러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44-47p) …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으나…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50-53p)” 책 속의 소년은 어른이 되어갈수록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무를 착취하고, 위 인용절처럼 소년의 행복을 내내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던 나무의 진심을 문득 되짚는 순간이 엿보인다. (*쉘 실버스타인, 김영무 옮김, 『아낌없이 주는 나무』분도출판사, 2018.)


다만 이야기의 모델이 되어준 나무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오밥 나무(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왕자의 별을 훼손하는 대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나무이기도 하다)이며, 본래 1만 년까지 살 수 있는 바오밥 나무가 수년 전부터 지구온난화로 인해 충분한 수분을 마실 수 없어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소설에서 훗날 노인이 되어 찾아온 소년에게 나무가 유일하게 남은 밑동마저 내어 쉬어가게 하고,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라고 (인간 서술자가) 관계를 화해시키는 듯 말하는 결말에, 예전과는 다른 슬픔을 맞았다. 나의 행복조차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의 행복을 함부로, 반복적으로 자신하는 목소리가 사뭇 기만적으로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 간의 우정을 빙자하며 실은 한쪽이 평생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관계에 감동이라는 평을 붙이기가 두려웠다. 그런데도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부모―자식과 같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고 치환하여 가르치고 배우게끔 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비교적 편히 함께 흥얼거릴 수 있도록 부드럽고 직관적인 동요의 느낌으로 이 노래를 쓰려던 가운데 본래 의도한 반성의 무게가 희석되어 아쉽지만, 이를 통해 이 이야기뿐 아니더라도, 자연과의 조화를 가장하여 인간에게만 이로운 교훈을 얘기하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볼 수 있는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끝으로 이 노래는 ‘좋아서 하는 밴드’가 2012년에 발매한 <북극곰아>에서 영감을 받은 바 있다. 언젠가 빙하 문제에도 그냥저냥 무관심하던 수업 분위기를 환기하고 주의를 집중시킬 겸 그 노래를 들려주자,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은 노래의 메시지에 감명받아 주목했다기보다, 수업에서 공부가 아닌 다른 거리를 즐길 수 있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노래가 주는 힘을 믿는 나는 잠시만이라도 시험 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쾌한 멜로디가 약속하는 ‘차가운 얼음 위에 네가 살 수 있게 / 뜨거운 여름에도 내가 참아볼게 / 에어컨은 잠시 꺼둘게’라는 소박한 가사에 담긴 마음이, 얼어붙어 있던 아이들의 마음을 더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  노래와 비하인드 에세이는 2022년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의 인문실험 '트러블연구소' 프로젝트의 시민연구원으로 참여했던 두 달간, 기후정의 담론을 공부하며 준비했던 공유전시회에서 발표한 창작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재생하려면, 되감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