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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Dec 27. 2023

플라타너스와 단풍

존재 자체로 소중해

  어릴 적 고향집 앞에는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키가 얼마나 컸던지 나뭇가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것 같았고 가지는 옆으로 쭉쭉 뻗어나가서 우리 집 지붕을 절반이나 덮었다. 나무줄기는 두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굵었다. 한여름에는 어른 손바닥보다 큰 잎사귀가 빽빽하게 나무에 매달려서 그 밑은 큰 천막을 친 것처럼 넓은 그늘이 졌다. 동네어른들은 나무 아래 놓인 들마루에 앉아서 더위를 식혔고 아이들은 그 옆에서 공기놀이나 땅따먹기를 하며 놀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급한 대로 나무 밑에 파고들면 큰 비는 피할 수 있었다. 가을이 되면 큰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지붕과 마당을 뒤덮었다. 빗자루로 쓱쓱 쓸어서 마당 한 귀퉁이에 수북이 모아 놓았다가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썼다. 잎사귀가 크고 부피도 커서 금방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잎사귀도 많이 달린 나무 주변에 자주 모였고 그런 나무가 쓸모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나무가 항상 이로움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크면 클수록 해로움도 늘어났다. 여름만 되면 셀 수도 없는 송충이가 나무에서 지붕을 타고 마당까지 내려와서 꿈틀댔다.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가 늘어나서 방제약을 뿌려야 했다. 약을 뿌리지 않으면 송충이가 나뭇잎을 다 갉아먹어서 나중에는 나뭇잎이 모기장처럼 변해버려서 햇빛을 가릴 수도 없게 된다. 송충이를 잡으려고 소방차처럼 긴 호스가 달린 방제차를 불러 물대포를 쏘아 올리고 약을 치면 후드득 소리와 함께 우박소리처럼 기절한 송충이가 바닥에 떨어져서 꿈틀거렸다. 징그럽고 소름 끼쳐서 절대 마당으로 나가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고 송충이와의 전쟁도 끝날 무렵 태풍이 찾아왔다. 비와 바람이 동시에 불어대니까 나무는 미친 듯이 허공을 휘저었다. 부모님은 태풍보다 큰 나무를 더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지붕 위에 쓰러지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또 우리 집뿐만 아니라 옆집에도 위협적인 나무였다. 어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놀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불과 두해 전까지도 나는 고향집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큰 무언가를 지향점으로 삼아 경주마처럼 달렸다. 경주마는 옆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그의 목표는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달릴수록 결승점은 더 멀어지고 몸은 점점 지쳐 이곳저곳 아프기도 했다. 몸이 브레이크를 밟은 셈이다.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달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내 주변에 작은 나무들이 멈춘 후에야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는 나지막한 단풍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키는 1층 높이쯤 되고 나무줄기는 홍두깨 굵기 정도에 가지는 짧은 파마머리처럼 뻗었다. 수종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세월이 더 흘러도 큰 나무로 자라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공동 현관에서 나오면 바로 눈에 띄는 위치에 서 있어서 오며 가며 계속 보게 된다. 봄에 사람들이 벚꽃에 빠진 사이 소리 없이 잎이 돋아난다. 아기손보다 작은 잎사귀로 여름을 나고 가을로 접어들 때쯤 맨 먼저 잎사귀를 물들일 준비를 한다. 다섯 갈래 초록색 잎사귀가 끝부터 조금씩 붉고 선명한 붉은색으로 갈아입는다. 나무를 지나는 길에 잠깐 서서보면 한여름에는 간신히 햇볕을 피할 만큼이지만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하늘이 더 높아지는 가을에는 햇살에 뚫릴 것 같은 여리고 투명한 잎사귀를  흔들면서 반겨준다. 서리가 내린 후에도 한동안 여린 잎사귀를 쉽사리 떨구지 않는다. 키도 작고 잎사귀도 여리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런 단풍나무에게도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그래도 문득 햇살이 그리워지면 집 근처 공원에 나간다. 집안에서는 무덤덤했던 계절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붉은 벽돌색깔을 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잎이 남아있는 나무와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엉성한 나무들이 서로 뒤엉켜서 중년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천천히 걷다가 가지만 남은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추고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면서 나무 꼭대기부터 밑동까지 살펴보았다. 나무의 키와 줄기모양으로 보아 어떤 나무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잎사귀도 이름표도 없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내 궁금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는 그 자체로 그곳에 서 있었다. 내 눈에는 무거운 짐 내려놓은 어깨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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