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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Mar 04. 2024

#9. 입사만큼 힘든 퇴사

혼돈의 시간들


30년 경력의 공직자가 내 직전력이다. 조직에 오래 몸담았던 한 사람이 그 조직을 벗어나는 일은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날 때처럼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결국 두 번 수술대에 오르고 나서야 내 발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12년 전 발병한 갑상선암과 함께 마음속에서는 작은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 인생은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었다. 그것은 투병하면서 얻은 깨달음이었고 그로 인해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당장 무언가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20년 동안 쌓은 직장 경력을 하루아침에 던져버릴 용기도 없었을뿐더러 직장을 나오면 직면할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극히 안정지향형인 내 선택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후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면서 별 탈없이 쳇바퀴 돌듯 살았다. 뭔가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막연한 갈증 속에서 헤매다가 또다시 가속페달을 밟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원하든 아니든 흐름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승진이 바로 그 흐름이다. 입사 동기보다 뒤처지거나 더 나아가 후배에게 추월당하면 왠지 모를 자괴감에 시달려야 한다. 진작에 승진 욕심은 접어두었지만 막상 내 차례가 다가오자 금방 물살에 휩쓸려버렸다. 일에만 매달리느라 건강관리는 뒷전이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승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빠져있는 동안 다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장기에 종양이 생겨서 수술하지 않으면 악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마지막 전력을 다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병이 나버렸으니 더 이상 승진에 욕심을 낼 수 없었고 마음을 비우고 회복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다행히 몇 개월 후 건강을 되찾고 운 좋게 승진도 하게 되었다.


막상 승진을 하고 나니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월급이 오르고 직함이 생겼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허탈함이 더 컸다. 떠밀리듯 살다 보니 분에 넘치는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행복하기는커녕 마음만 더 혼란스러웠다. 퇴직할 때까지 계속 다녀야 할아니면 퇴직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5년 이상을 보냈다. 마침내 다른 지방으로 전근 가야 할 상황이 되자 이상 망설이다가는 정년까지 떠밀려갈 같아 바로 결단을 내렸다.  누군가 정해준 시간표대로 살던 나였는데 울타리를 벗어나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지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을 찾지 못해일단 부딪쳐 보기로 한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무모했던 순간이 아닐까 한다.


더 이상 떠밀리듯 살고 싶지 않아서 퇴사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삶이라는 거대한 물살에 떠밀리지 않고 살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단지 물살의 흐름을 잘 살펴 물 위를 유영하는 자의 지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해 물에 빠지는 연습부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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