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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an 03. 2024

느리게 살아보기

삶의 여유도 연습이 필요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창가로 다가간다. 오늘 날씨는 어떤지 또 도로 위 교통상황은 순조로운지 살핀다. 출근을 멈춘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침마다 출근을 떠올린다. 직장을 그만두면 아침잠을 실컷 자려고 했는데 여전히 같은 시각 잠에서 깨고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는다. 30년 동안의 직장생활에 최적화된 생체리듬이 좀처럼 느슨해질 줄 모른다. 쉰다고 뭐라 잔소리할 사람도 없는데 요일별로 시간표를 짜서 강좌를 듣거나 정기 모임에 가기도 하고 비는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여. 사는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

우연히 핑크마티니의 초원의 빛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그래 쉬어야 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날 오후 바람도 쐴 겸 소제동 마을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대전역에 내린 뒤 마을입구까지 걸어갔다. 마을 안내판에는 소제동의 유래가 적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철도종사자 거주시설로 만든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지금은 낡고 허물어져 스산했고 빈집들만 즐비했다. 잠들어 있는 골목을 깨우듯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작은 하천길로 들어섰다. 그제야 천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카페거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듯 이 동네를 심폐소생술을 한 것 같았다. 덕분에 예쁜 카페를 보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조금은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한참 걸어 다니며 구경하다 보니 춥고 다리도 아파서 쉴 곳을 찾아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한옥 처마 끝에 새로 벽을 쌓은 곳에 통유리창을 달아 볕이 들어와 테이블에 가득 내려앉다. 잠시 후 진동벨이 울리고 고려청자 빛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통나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물을 담은 주전자도 함께 주는 걸로 봐서 커피 농도를 취향껏 조절하라는 주인장의 배려인 것 같았다.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다가 한 모금 마시기를 되풀이했더니 서서히 몸에 온기가 퍼졌다. 탄맛이 적절한 숭늉버전의 커피맛이  잘 어울렸다. 커피를 마시다가 가끔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과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즘의 내 일상을 돌아보았다.  쉬고 싶어서 퇴직했는데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꽉 찬 일정표 대신 오늘처럼 드문드문 여백을 두고 느리게 사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멈춘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간처럼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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