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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an 10. 2024

#3. 어머니의 찻잔

나를 따스하게 하는 것들

  

  오래된 찻잔 하나를 가지고 있다. 우유와 물을 반반 섞은 것처럼 불투명한 색깔의 밀크글라스 찻잔이다. 따뜻한 찻물을 담고 검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찻잔 손잡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마시다 보면 꼴깍하는 목 넘김 소리에 뒤이어 찻잔과 잔받침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잡념 속으로 빠져드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몇 해 전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봄날 어머니는 갑자기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셨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 밖으로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므로 병문안은  더더욱 어려운 때였다. 어머니 얼굴도 볼 수 없고 걱정은 되고 마음만 답답했다. 워낙 상태가 위중해서 그러다가 영영 이별하는 게 아닌가 초조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언니와 친정집에 가보았다. 거실 한쪽에 시든 화초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어머니가 드시던 약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댔다. 언니는 ‘주방부터 정리하자’라며 주방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밀었다. 주방은 어제까지 어머니가 계셨던 것처럼 그다지 치울 것은 없었다. 할 일 없이 싱크대 수납장을 이곳저곳 열었더니 상부장과 하부장에 오래된 그릇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물건이 닳아 없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버리지 않는 분이라서 그럴 만도 했다. 본 김에 그릇정리를 시작했다. 밥공기, 국그릇, 접시 등 여러 종류의 그릇들은 찌든 때라기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실금이 가거나 모서리가 깨진 것, 개업집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밥공기와 접시, 내가 자취할 때 쓰던 그릇까지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들을 골라내서 주방바닥에 늘어놓았다. 버려도 되는 그릇인지 다시 살피던 중 낯익은 밀크글라스 찻잔을 발견했다. 손때 묻은 것처럼 변색되어 낡아버린 그 찻잔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있었던 도자기 세트 중 하나였다. 그 당시 도자기 세트는 두꺼운 종이박스에 밥공기와 국그릇, 접시, 찻잔들이 차곡차곡 담겨있었는데 모양도 예쁜 데다가 반짝반짝 윤이 나서 어머니도 나도 꽃을 대하듯 만지작거렸었다.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그 많던 그릇들은 온데간데없고 지금까지 남은 것은 달랑 찻잔 두 개와 접시 몇 개뿐이었다. 그릇을 정리하던 언니는 말없이 신문지를 가져와 찻잔과 받침을 포장하더니 한 세트씩 나눠 가지자고 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쩌면 유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서 가방에 넣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마냥 눈물이 나왔었다.    


  그 해 가을, 기적처럼 어머니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차츰 기운을 차리시더니 추석을 앞두고는 보행기를 끌고 동네 미장원에 가서 뽀글 머리 파마를 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셨다. 졸지에 언니와  나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찻잔을 훔친 나쁜 딸이 되어버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제 내 주방살림 중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은 어머니가 쓰시던, 오래된 밀크글라스 찻잔이다. 수납장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가 가끔씩 마음이 어지러울 때 꺼내어 따뜻한 차를 담아 마시곤 한다. 찻잔은 손가락이 데일 것처럼 뜨거운 액체를 담고서도 비명 한마디 없이 내 곁에 있어준다. 게다가 쉬이 깨지거나 녹아내리지도 않는다. 다만 싸늘한 내 손을 천천히 데울 뿐이다. 어머니처럼 나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따스한 찻잔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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