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들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그럴 듯한 소리에 약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일부러 아이돌 노래 같은 대중 문화와 거리를 뒀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것을 즐기면 부자들의 노예가 된다고 믿었다.
물론 재미를 다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사극이나 무한도전은 선택적으로 봤지만, 그 외에는 최대한 멀리했다. 그 탓에 친구들과 접점이 없어질지언정, 나는 커튼 뒤에 숨은 부르주아들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생긴 습관 탓에 서른이 된 지금도 유행에 둔감하다. 트와이스에 누가 있는지, BTS와 뉴진스에 누가 있는지 여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의 얼굴을 본 것도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 나왔을 때였다. 어릴 때 믿은 그럴 듯한 소리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심하고 검증하는 습관을 들일 때까지, 나는 종종 그럴 듯한 소리를 들으면 덜컥 믿어버렸다. 유튜브에서 확산하는 가짜뉴스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마 더 폐쇄적이고 반사회적인 이야기를 믿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이렇게 근거는 그럴 듯한 소리에 약한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그럴 듯하기만 한 소리가 계속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먄, 사람은 누구든 언제든 그런 소리를 믿게 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럴 듯한 소리를 믿게 되는 조건을 치우지 않으면, 결국 그럴 듯한 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듯한 소리는 왜 이렇게 힘을 발휘할까. 저서 '미스빌리프'에서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여러 연구를 소개했다. 그 중에서 초반부에 나오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신뢰 부족'이다.
애리얼리의 설명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다. 우리 집은 갑자기 주 소득원인 아빠를 잃었다. 그 탓에 엄마 뿐만 아니라 나도 집안 사정과 내 미래에 대해 하루종일 걱정해야 했다. 이렇게 끝없이 걱정하다 보면, 문제를 넓은 시야로 관찰하거나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켜두면 컴퓨터가 느려지는 것처럼, 끝없는 걱정에 빠지면 뇌가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힘든 상황에 처한 모두가 생각하는 능력을 잃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회복탄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이 강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생각하는 능력을 어느정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회복탄력성이 약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합리적인 사고를 유지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그 회복탄력성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공동체다. 가족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어려울 때 공동체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회복탄력성의 힘으로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있다. 특히 어릴 때 좋은 부모를 만나서 든든한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사람은 커서도 차분하게 생각하며 큰 위기에 잘 대처한다.
반대로 불안정한 관계에서 자랐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어두운 숲에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매순간 주변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위기에 처하면 합리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금방 잃을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그럴 듯한 소리가 들리는 깊은 동굴의 진입로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에 처하면 원인과 해법을 찾으려 한다. 이 때 좋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해서 회복탄력성이 약한 사람은 더 다급하게 원인과 해법을 갈구한다. 차분하게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답을 얻으려 한다. 이 때, 근거는 부족하지만 이해하기 쉽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접하면 어떻게 될까.
흔히 우리나라를 공동체주의 문화권으로 분류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좋은 공동체가 많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해방 직후부터 자녀를 집안 지위상승의 도구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많은 부모가 가정폭력에 둔감했고, 지금도 교육으로 포장된 학대를 자행하는 부모가 많다. 부모와 자녀의 애착 관계는 건강한 정신의 기초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애착 관계를 갖지 못한 자녀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위급할 때 잘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200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지출하는 복지 예산보다 가족끼리 나누는 돈이 더 많았다. 복지예산이 다소 늘어난 2010년대 이후에도, 송파 세 모녀 같은 사례가 수두룩하게 나타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좋은 부모도, 좋은 이웃도, 좋은 국가도 없이 살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것이 불평등인 듯하다.
우리나라는 상당히 불평등한 편이다. 2022년 영국에서는 상위 1%가 세전 12만 파운드를 벌었고, 상위 50%가 27,000 파운드를 벌었다. 서로 4.5배 차이가 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통합소득 상위 1%가 평균 4억 8,000만 원을 벌었고, 상위 50%가 2,800만 원을 벌었다. 무려 17배 차이가 난다.
불평등이 심한 곳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경쟁자가 된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기 마련이다. 비교하지 않으면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상황인지 알 방법이 없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조언은 인간 심리를 외면하는, 무의미한 소리다.
불평등이 심한 곳에서는 자신의 지위가 낮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다. 입고 있는 옷, 들고 있는 가방, 타고 다니는 차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동물에게 지위가 낮다는 말은 생존이 위태롭다는 의미로 통한다. 마치 호랑이가 옆에 있으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다.
그래서 불평등한 곳에서는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리기 보다는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데 집착한다. 지위 격차가 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밟아서라도 높은 지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지나친 불평등은 부모들이 아이들 정신건강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새벽까지 학원에 보내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매 순간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사는 나라에서는 서로를 이웃처럼 기댈 수 없다. 댄 애리얼리 역시, 공동체를 위협하는 주 원인으로 불평등을 지목했다.
우리나라는 '유튜브가 진실이야.'라고 외치는 사람이 나타나기 딱 좋은 환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