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업 경력만 화려해지는데 괜찮은 건가] 3장
비몽사몽
"알람이 몇 번 울렸는데 안 일어나니."
참다 못한 엄마가 깨우러 왔다. 처음 알람을 듣고 5분 뒤로 다시 맞췄다. 그걸 세 번 반복했다. 더 밍기적거리면 버스를 30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파리바게트를 다닐 때 자주 잠을 설쳤다. 평발이라 그랬는지 운동 부족이라 그랬는지, 밤마다 종아리 안쪽이 꽉 조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심할 때는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그래도 퇴사하는 날까지 병원에 들르지 않았다. 큰 병으로 진단받느니 차라리 병원에 가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잠을 설칠 수는 없어서 대안을 검색했다. 하지정맥 수술 같은 무섭고 비싸 보이는 단어가 나오면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몇 일 동안 스크롤을 내리다가 희망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플라세보 효과였다.
헛된 믿음
가짜 약을 진짜라고 믿으면 통증이 가라앉는다니,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검색하면 할수록 플라세보 효과를 지지하는 증거들이 쏟아졌다. 어떤 과학대중서는 플라세보 효과로 만성통증을 이길 수 있다며 긍정적인 믿음의 힘을 설파했다.
솔깃한 이야기가 있었고, 나는 절박했다. 둘은 썩 좋은 조합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는 밤에 깊게 잠들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플라세보 효과와 관련된 책을 샀다. 조언은 얼추 비슷했다. 통증의 긍정적인 면을 떠올리거나, 몸이 낫는 이미지를 최대한 선명하게, 반복해서 떠올리라고 했다.
그렇게 퇴사하는 날까지 조언을 따르며 플라세보의 기적을 기다렸다.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아서 의구심이 들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불손한 생각을 잊으려 했다.
한 발 늦은 진실
훗날 다이소에 들어가면서 하루 근무시간이 줄었다. 동시에 종아리 통증도 사라졌다. 어떻게 봐도 플라세보 효과 덕분은 아니었다.
나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진짜 과학자가 쓴 신경과학책을 읽었다. 어려운 전문용어가 있으면 1주일 넘게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해하려 했다.
사실, 플라세보 효과에서 말하는 '믿음'은 고작 긍정적인 해석과 상상력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믿음은 뇌가 오랜시간 경험을 통해 학습해서 무의식처럼 저장하고 있는 기대 심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대를 바꾸려면, 그만큼 오랜시간 뇌가 다른 경험을 겪어야 한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밝은 미래를 그린다고 해서 뇌가 기대를 바꾸지는 않는다. 특히 심각하게 우울할 때 긍정적인 생각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그럴 떄 필요한 것은 애써 밝게 보려는 노력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심리치료다.
그래서 진짜 과학자들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플라세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과학 대중서가 이론을 너무 단순하게 또는 과하게 해석한다.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마치 통증이 사라지는 미래를 꿈꾸기만 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는 듯이 설명한다. 나 같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만, 엄연히 잘못된 설명이었다.
나는 게르마늄 팔찌를 사는 사람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지금까지 산 과학대중서에 밑줄을 그은 것이 후회되었지만,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과학'을 앞세운다고 해서 다 유용한 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비싼 값을 치르고 배웠다.
자세가 인생을 바꾼다는 편리한 말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과학 중에는 설명이 잘못되었거나 근거가 부족한 것이 많다. 특히 힐링에세이나 자기계발서에 과학 아닌 과학이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 하나가 '파워 포즈'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미 커디와 동료들이 제안한 가설이고, 우리나라에도 관련된 책이 번역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체 언어가 정신상태를 바꾼다.' 예를 들어, 높은 사람이 된 것처럼 여유롭고 힘 있는 자세를 취하면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든다. 즉, 심리적으로도 강해진다.
그 간단함 덕에, 에이미 커디는 테드 강의 뿐만 아니라 서점가에서도 굉장히 성공했다. 우리나라 자기계발 시장에서도 파워 포즈는 상식처럼 자리잡았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서 파워 포즈 가설은 많은 심리학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그 핵심은 이렇다. 어떤 가설이 과학적인 이론으로 인정받으려면, 여러 사람이 같은 실험으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기압이 1일 때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고 주장하려면, 다른 사람이 관찰할 때에도 같은 기압에서 같은 온도에 물이 끓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 실험에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 과학자들은 그 가설이 '재현성'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파워 포즈 가설은 재현성이 없었다. 다시 말해, 여러 실험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자세가 호르몬 분비까지 바꾼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심지어 커디의 동료 중 하나인 다나 카니가 실험 과정에 문제가 많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파워 포즈는 '과학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파워 포즈 가설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플라세보 효과가 긍정적인 생각의 힘으로 통하는 것처럼, 파워 포즈도 자기계발서의 단골 소재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끈기라는 뻔한 말
또 다른 사례는 '그릿Grit'이다. 우리말로 하면 끈기에 가까운 단어인데, 미국 심리학자 안젤라 더크워스가 유행시킨 가설이다. 이번에도 내용은 간단하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지 예측하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은 외모나 지능, 사회성이 아니라 끈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끈기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그릿 역시 테드 강의와 대중서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더크워스는 그릿의 유용함을 설파하며 자기계발 시장의 대주주가 되었다. 대니얼 길버트 같은 유명한 심리학자도 그릿을 성공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결국은 그릿도 엄밀한 과학적 거름망을 통과하지 못했다. 파워 포즈처럼 재현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2020년 7월, 이스라엘 과학자 첸 지스먼과 요아브 간자크는 미국인을 표본 삼아서 그릿 가설을 검증했다. 그 결과, 성공을 예측하는 데는 그릿 보다 지능이 수십 배 더 유용했다.
그릿이 성공을 예측하는 데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지능이나 가정 환경보다 도움된다고 하기에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실제로 고시원에 살면서 공무원 시험에 4번째 도전하는 사람이 부모의 지원 덕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자세한 비판은 제시 싱걸의 '손쉬운 해결책'과 스튜어트 리치의 '사이언스 픽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 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이다.)
과학의 탈을 쓴 잔소리
파워 포즈나 그릿 같은 부족한 가설들에는 위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노력만능주의를 떠받친다는 것이다.
자세가 동기를 부여하고 스트레스를 줄인다면, 자세를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력하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그릿이 성공을 예측하는 핵심 요소라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끈기가 부족했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플라세보 효과에 대한 잘못된 설명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쉽게 믿음을 바꿔서 통증이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면, 삶의 고통은 각자가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결과가 되어버린다.
가설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가 실수하면, 대체로 사람은 실수한 사람이 처한 환경보다는 실수한 사람의 성격이나 지능 같은 내면을 원인으로 지목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향을 심리학자들은 '근본적 귀인 오류'라고 부른다. 그릿 같은 단순한 가설과 근본적 귀인 오류는 궁합이 너무 좋다.
'과학'은 권위 있다. 엉뚱해 보이는 소리라도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과학자가 이야기한 것과 대중서적이 이야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때가 많다. 심지어 유명 과학자의 주장 중에도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한 자기계발서나 강연만 믿고 옆 사람에게 너무 쉽게 조언을 준다. 그러면서 쉬운 조언조차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실패의 책임을 모두 떠넘긴다. 정말 과학적인 사람이라면, 노력이나 끈기 같은 한두 가지 요인만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선뜻 단언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