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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살랑 Apr 08. 2024

그녀와 절교할 뻔

광교 푸른 숲 책뜰에서 일어난 사건번호 공삼이팔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한 평도 안 되는 자그마한 공간에 의자 두 개와 빈백, 캠핑의자 하나씩 그리고 반달 모양의 책상 하나가 눈을 찡긋하며 손짓한다. 나만 알고 싶은 고요함, 숲과 나무로 둘러싸인 북스테이 같다.


J 언니는 새벽 5,6시부터 잠이 깨어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성격이다. 저녁에 일찍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동안 나태하게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책을 보거나 뜨개를 하거나 뭐라도 하는 그녀. 피곤하대서 잠 좀 자라면 절대 안 자는 그녀. 설렘으로 이곳을 첫 방문했던 이틀 전과 다르게 오늘은 매우 피곤한 얼굴로 빈백에 몸을 기댄다. 나는 가만히 스케치북과 노트북을 꺼내어 그림을 그릴까 글을 쓸까 기분 좋은 고민에 빠진다. 숲 속 오두막 같은 이곳에서의 쉼을 기록하고 싶다. 자연도 가만히 숨을 고르는 기분 좋은 가르랑 속에 문득 그녀의 깊은 숨소리가 들린다. 절대로 자는 법이 없는 그녀인데 내 옆에서 잠이 들었네. 이 기분은 뭘까. 서로 대화가 없어도 편안하더니 어느덧 서로의 곁에서 가장 편안히 쉴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런 그녀를 보며 무언가에 이끌리듯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3시간에 10,000원의 사용료를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이곳은 광교 푸른 숲 도서관의 책뜰이라는 곳이다. 매월 첫째 날, 다음 달 책뜰을 예약할 수 있는데 총 5채로 예약이 치열하다. 이번에 운 좋게도 J언니와 내가 각각 취소분을 주워 한 주에 두 번이나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첫 번째 방문의 설렘을 글로 남기려 했는데 두 번째 방문 후 절교할 뻔한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사건번호 이공이사공삼이팔. 책상에 앉아 연필을 서걱거리며 전면의 통유리를 올려다본다. 하늘 한 번 보고 연필 한 번 덧칠하고, 하늘 한 번 보고 연필 한 번 덧칠하며 색연필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빈백에 폭 안긴 언니가 구름 속에 안긴 듯 어쩌면 구름산책이라도 하고 있나 상상해 본다.


하늘 한 번 보고 그림 한 번 그리고


[구름산책]은 책뜰에서의 독서나 모임 후 그 기분을 이어가기에 안성맞춤인 작은 책방 겸 카페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이미지와 감성이 중요한데 책뜰에서의 감성이 구름산책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구름 같기도 하고 새들의 날갯짓 같기도 한 둥실 거리는 조명이 눈을 사로잡고, 책방주인이자 작가님이신 사장님이 내가 묻는 책마다 애정을 듬뿍 담아 자식 자랑하듯 소개해주신다. 우리 왜 이제야 이곳을 알았냐며, 오길 잘했다, 내 스타일이다, 연신 감탄을 자아낸다. 그림책 종류는 많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오후의 소묘] 출판사에서 펴낸 [마법의 매듭]이란 책이 있었다. 뭉근한 색연필 감성이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내 최애 그림작가 중 한 명인 모니카 바렌고의 책이다. 한 장 한 장 넘겨 볼수록 그림 속 마녀는 매듭을 풀어가는데 어라, 현실에선 매듭이 꼬이고 있었다.


별로 오래 자지도 않은, J 언니가 잠이 깼다. 피곤하면 잘 수도 있지 무슨 전쟁에 지기라도 한 마냥 깜빡 잠든 것을 겸연쩍어한다. "언니 진 거 아니거든, 오히려 내 곁에서 곤히 잠든 게 난 보기 좋더라"라고 말하진 않고 아무 설명 없이 그림을 쓱 들이밀었다. 뭔가 감동적인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렇게 당황스러워할 줄이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언니의 자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걸 알고는 더 기겁을 한다. 아무래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또 멋대로 행동한 거 같다. 내가 개념이 없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데 이번 일도 포함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 같으면 별로 아무렇지 않을 거 같은데 역시 사람은 다른가 보다. 하기사 입 벌리고 침 흘리고 교양 없이 자는 모습이라면 싫을 수도 있지만, 내가 찍은 언니는 참하게 자고 있는데. 사진 찍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Shy 한 언니를 충분히 배려 못한 것 같다. 오늘도 그녀와의 다름을 이렇게 또 확인한다. 다른 의도는 없었어, 잠든 언니의 모습은 이곳에서의 쉼 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고.  


적잖이 당황했으면서도 나를 이해하려는 그녀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이 그림은 올리지 않겠다고 다. 그런데 그만, 그녀의 메시지에 감동해 버렸다. "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세력에 너의 창작세계를 좁혀서는 안 돼. 당당하게 살아" 헉 모야모야 너무 멋있잖아. 언니가 '오빠'가 아니기에 망정이지 큰 일 날뻔. 그래서 언니 말 잘 듣느라 당당하게 동네방네 그림을 다 올리고 있다. 저 그림 언니라고 말 안 할게. 쉿~!


J 언니 아닙니다


p.s 이 내용을 글로 올린 것은 개념 있는 짓일까요, 아닐까요. 개념은 어떻게 하면 갖출 수 있나요.

개념과외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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