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계주 반 대표 4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니, 운동 잘하는 남자가 이상형인데 엄마 눈엔 하트가 뿅뿅 발사된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남편에게선 못 맡았던 운동인의 냄새가 내 아들에게 나다니. 5학년 겨울방학 때 친구 따라 시킨 배드민턴 특강에서 빛을 발하더니, 중학생이 되어 배드민턴부에 발탁됐다. 학교 배드민턴부가 꽤 인기가 있는지, 많은 아이들이 입회테스트를 치르는 동안 본인은 2, 3학년 심사위원석에 앉아 구경을 했다며 자랑한다. 축구나 농구 잘하는 아들이 한 놈이라도 있길 바랐는데 배드민턴에서 희미한 빛이라도 보는가.
걸어서 십여분 공부방
매번 버스 타고 집에 오더니 계주를 앞두고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짧은 거리를 버스 타고 다니는 게 못마땅했는데, 돈 굳고 건강 챙기고 달리기 연습하니 일석삼조다. 운동회 날 아침으로 뭘 먹어야 할지 수능날인 것 마냥 신경 쓰더니 간편하게 바나나 한두 개만 먹고 나갔다. 매일 이랬으면. 나중에 알았지만 오후에 있을 달리기 때문에 점심도 안 먹었단다. 엄마들 와도 된다 해서, 1시 30분에 예정된 계주 결승을 보기 위해 모임을 서둘러 끝냈다. 오전 예선을 통과해야만 오후 결승에 나올 수가 있는데, 예선을 제발 통과했기를. 도착해 아이들 있는 곳에 찾아가서 아들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손에 웬 그물같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음 순서가 줄다리기인데 맨 앞에 선다고 붕대까지 감은 거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계주 예선에서 달리다 대차게 넘어져서 왼쪽 손, 팔꿈치에 피가 나고 골반까지 쫙 까졌던 것이다. 결국 3개 반 중 꼴찌로 예선 탈락이었는데 2등의 실격으로 어찌어찌 예선에 통과했다고 한다. 휴 애가 달리는 거 볼 수는 있겠군.
드디어 결승이 시작됐다.
운동장에 하얗게 분칠 한 달리기 라인, 그 라인 따라 주르르 선 아이들, 환호하는 아이들, 탕 하는 총소리, 흩날리는 머리카락, 넘어지기 쉬운 커브코너 그리고 마의 구간 바통터치.... 이 모든 장면이 흑백필름 속에 펼쳐졌다.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엄마'가 되어 서 있다. 아들 둘, 남편 하나(?), 그리고 햇빛 들어오는 집과 편히 누울 침대까지. 어릴 적 감히 생각도 못했던 평범한 행복이 나를 두르고 분에 넘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한때 이 평범함을 얼마나 싫어했던지. 특별하고 싶어 흙빛으로 가득했던 우울한 이삼십 대였다. 그 시절 그렇게 바라던 빛나는 직업, 전문성, 성숙한 성품은 여전히 이루지 못했다. 아이 둘 낳았지만 육아에 살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잘하는 게 없다. 그런데 바통을 받고 달리는 아들의 머리카락과 힘줄과 숨결을 보고 느끼며 왜 이리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 두 다리가 힘차게 어긋나며 앞으로 내달리는 저 모습에 울컥함이 올라온다. 내 인생에 이룬 것이 없다고 절망하던 나여 - 하늘은 맑고 아이는 달리고 나는 그걸 바라본다.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나는 이제 결코 예전에 하던 그런 종류의 절망은 하지 않기로 한다.
계주대역전 드라마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스타트 등수가 끝까지 이어져 아들 반은 2등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른 종목 점수를 합산해 아들 반이 종합 1등을 했다. 기분이 좋아 그날은 공부방에 안 가시고 맛있는 거 해달라는 아들, 그래 고생했다 많이 먹어. 자 이제 그 승부욕을 공부로 옮겨볼까? 처음 보는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