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허용하는 면회시간이다. 면회가 끝나고 문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병실 안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양손과 발에 주렁주렁 주삿바늘이 꼽혀 있는데 어떻게 전화를 한 건지, 급한 내용일까 싶어 얼른 받았다.
"어, 왜?"
"한 번만 더 보고 가면 안 돼?"
"안될걸? 왜, 더 할 말 있어?"
"아냐. 나갔어?"
"아직. (간호사님, 한번 더 들어가도 되나요?) 아, 안된대"
"알았어. 가라"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도 없었고 생전 아프지도 않던 언니다. 20대 때 364일을 나가 놀다가 하루 된통 술병에 걸려 끙끙 앓으면 다음날 기어나가 술로 해독하던 언니다. 골골 앓는 건 항상 나였다. 대학시절,수업만 듣고 와도 온 에너지를 다 써서쉬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피곤해서 날마다 감기로 몸살로 드러누웠다. 자주 아프기도 했지만 매일을 무기력으로 골골대며 살아왔다.
마흔 전후로 언니도 나도 어릴 적 상처들이 끄집어내지기 시작했고, 특히 요 근래 1,2년 동안 자신을 깊이 직면하느라 많이 아프던 언니였다. 정신뿐 아니라 몸에서도명치쪽이많이 아파 위내시경을 받으러 갔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지. 심전도 결과 급성심근경색 같다고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고 조영술을 하던 중 부정맥이 와서 생명의 위험을 겪었단다(순서가 맞나). 방금 전까지도 나랑 카톡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심정지가 올 뻔 했다니, 누가? 소식을 전하는 형부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응급실에서 온몸이 발가벗겨져 8명의 의사, 간호사가 달려들었다는 긴박한 영화 속 장면을 겪고 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유일하게 허락된 30분의 면회시간을 형부와 함께 들어갔다. 양손과 발에 주삿바늘과 측정기계들을 치렁치렁 매달고 버석하게마른 낯빛을 한언니가 죽은 듯 누워있었다.
이혼가정 아래, 엄마도 아빠도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던 내게 세 살 위언니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다. 여덟 살 여름방학, 엄마와 갑자기 헤어져 아빠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처절한 슬픔을 느꼈던 열한 살 언니에 비해, 내겐 그래도 슬픔의 자리에서 무릎을 껴안고 웅크려있다가 고개를 들면 바라볼 언니가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괴물에게 잡아먹힌 송강호의 딸(현서)이 괴물의 입속에서 토해졌는데, 마냥 어리기만 한 그 딸이 자기보다 더 어린 남자아이(세주)를 온몸으로 품어 안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 세주는 그 덕에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난다. 언니는 부모님의 부부싸움과 이혼의 풍파에 늘 전면으로 노출돼 있었고 나는 그런 언니의 등 뒤, 그늘 아래 웅크려만 있었다. 언니는 엄마아빠에게 매달리고 말리며 울었지만 나는 늘 뒷전에서 허약하고 의욕 없이 눈물만 흘리고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괴물의 입에 먹혀 들어가는 그 공포의 순간을, 세주는 보지 못했다. 현서의 품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있었을 뿐이다. 괴물의 이빨과 타액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건 현서였다. 언니는 내게 현서가 되어주었다.
각자의 상처로 인해 의좋은 자매사이는 결코 아니었던(과거형이다) 우리 사이에, 한 번만 더 보고 가면 안 되냐니 왜 그런 찝찝한 소리를 한 것인지 영 마음에 걸려나중에 물어봤다.
"도대체 왜 그런 소릴 한 거야?"
"그게 마지막일까 봐 그랬지."
"......"
그날 언니는 형부에게 전화를 걸어 형부와 애들 셋은 물론 나에게까지 유언을 남겨놓았다.
[oo이한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느라 너무 고생 많았다고 전해줘.]
정신과 약을 먹느라 감정의 요동이 없는 내게 힘 없이이어지는 언니의 목소리는 결국 내 눈물샘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언니가 중환자실에 누운 첫날 핸드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내가 보낸 마지막 카톡은 이거였다.
[머해. 죽으면 죽는다?]
아직 내 손에 죽기 싫은 언니는, 퇴원 후 여전히 또 나랑 같이, 어릴 적 못 채운 G랄 총량을 열심히 열심히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