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논픽션 사이
바람이 한결 가벼워진 걸로 보아, 다시 봄이 오려나보다. 계절과 계절 사이 부는 바람은 유난히 선하고 유해 마음을 술렁이게 만든다. 뭐랄까, 바람이 나를 비껴 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통과하는 것 같달까. 그래서 나를 이룬 모든 조각들이 죄다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의 자리를 찾게 되는 계절. 미처 맞추지 못한 틈 사이로 몇몇 아쉬운 기억들이 부유하는 계절. 왜 ‘다시’라는 말은 여름도, 겨울도 아닌 유독 봄과 잘 어울리는지를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진다. 모두가 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이 거리에서, 나무들만이 겨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앙상한 손아귀를 한껏 뻗고 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느긋하게 거리를 걸어본 것도 오랜 만이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오늘도 참 열심히는 살았다. 석사 논문 초안을 교수님께 컨펌받았고, 밀린 과외비도 받아내 월세를 겨우 처리했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생의 과제들을 해치워 나가다, 빈 시간을 대강 떼우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고작 이런게 인생인가 싶으면 허무하다만 단순해서 좋기도 하고. 참나, 제대하고 식료품 포장 알바를 할 때랑 다른 게 없다. 나는 아직도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그땐 양 손 검지손가락 옆에 굳은살이 생겨 한결 수월하기라도 했지.
무심코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다, 각지고 미끈한 감촉에 흠짓 놀랐다. 담배를 끊은지는 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종프레소다. 네가 즐겨 피던 담배. 작년 봄코트를 옷장에 넣을 때 깜빡하고 빼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쎄지도 않고 커피향이 나 기분전환으로 피기 좋다고 했었지. 그 하얗고 곧 부러질듯 한 형태가 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제작년 봄, 너는 취준을 앞둔 4학년이었고, 나는 갓 대학원생이 된 차였다. 교양수업 팀플로 만난 연이 있어 가끔 인사만 하고 지냈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자주 도서관에서 마주쳐 가끔 자판기 커피나 담배 정도 나누곤 했다. 별 시덥지 않은 얘기로 밤공기를 떼우다 어색한 정적이 흐를 때면 너는 운동화 코를 탁탁 찍었다. 다 헤진 너의 발끝을 보다 어쩐지 열람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엔 술 한잔 하자 할까 싶기도 했지만, 관뒀다. 취업시장으로 내몰린 여자와 대학원으로 도망친 남자라니. 너와 내가 술집에서 연출될 수 있는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홍상수다.
대신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택했다. 거의 매일 도서관이 끝날 시간에 맞춰 너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함께 쪽문 계단을 내려갔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달동네의 빛은 위태로이 명멸하고, 우린 그 빛을 나란히 하고 걸어 내려갔다. 너는 평소엔 잘도 쫑알거리면서 그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보다 한 발 앞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발을 내딛었다. 저러다 풀썩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싶었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보호자로써 침착하게 119를 부르는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돌렸는지. 그렇다고 내가 널 사랑한다거나 한 건 아니다. 적어도 그 때 까진 아니다. 그저 그 위태로운 걸음걸이가 조금 신경이 쓰일 뿐. 아마 너를 보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싶다.
무튼 그 날도 너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밤냄새가 유난히 짙고, 오늘처럼 바람이 가벼운 날이었다. 마케팅 공모전 발표날이라 했던 것 같은데,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또 떨어졌나 보다. 너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벚꽃이 참 이뻐요.”
“뭔 소리야, 벚꽃이 어딨다 그래.”
“저 나무들이요, 다 벚꽃나무에요."
“그건 알지."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요. 아무도 몰라주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꽃피우는 중인데, 지금도 저 나뭇가지 안에선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피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잖아요. 저 나무가 벚꽃나문지, 동백나문지, 아님 꽃을 피울 수 있기는 한 건지."
“…"
“하나도 관심 없었으면서… 그 모든 웅크렸던 시간들이 폭발하듯 피었을 때, 그제야 사람들은 외치죠. 아, 벚꽃 이쁘다. 봄이 왔구나.”
너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이를 악 무는 건지 귀 뒤가 움찔거렸다. 나는 문득 너의 깡마른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말했던 것 같다.
“그래, 벚꽃이 참 이쁘다 서연아.”
사실 그 날 이후의 기억은 산발적이다. 너의 자취방에서 몇 번 밥을 얻어 먹고, 몇 번 사랑을 나누고, 몇 차례의 계절을 함께 보내다 헤어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한 번도 너의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다. 너는 어느 겨우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겠다더니 영원히 나를 떠났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참 많은 순간들을 함께 했는데 이따금씩 툭툭 튀어오르는 너의 영상은 책상 앞의 너도, 침대 위의 너도 아닌, 벚꽃을 말하던 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의 너처럼 이를 악 문다.
담배는 이제 여차하면 불덩이가 입술에 닿을 정도로 타들었다. 찝찝한 커피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이렇게 얇아 빨리 타버리는 게 너는 뭐가 좋다고 고집이었을까. 꽁초를 바닥에 던지곤 다시 대로로 나갔다. 까만 도로 위로 자동차가 휙휙 지나가는 게 꼭 자동차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도로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이제 다시 컨베이어 벨트로 돌아갈 시간. 준비운동을 해야지. 찌뿌둥한 고개를 돌리다 하늘을 가르는 가지 끝에 무언가 맺힌 게 보였다. 꽃봉오리였다.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너는 어디에 있니.
너는 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