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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 Jun 07. 2017

벚꽃

픽션과 논픽션 사이

바람이 한결 가벼워진 걸로 보아, 다시 봄이 오려나보다. 계절과 계절 사이 부는 바람은 유난히 선하고 유해 마음을 술렁이게 만든다. 뭐랄까, 바람이 나를 비껴 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통과하는 것 같달까. 그래서 나를 이룬 모든 조각들이 죄다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의 자리를 찾게 되는 계절. 미처 맞추지 못한 틈 사이로 몇몇 아쉬운 기억들이 부유하는 계절. 왜 ‘다시’라는 말은 여름도, 겨울도 아닌 유독 봄과 잘 어울리는지를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진다. 모두가 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이 거리에서, 나무들만이 겨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앙상한 손아귀를 한껏 뻗고 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느긋하게 거리를 걸어본 것도 오랜 만이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오늘도 참 열심히는 살았다. 석사 논문 초안을 교수님께 컨펌받았고, 밀린 과외비도 받아내 월세를 겨우 처리했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생의 과제들을 해치워 나가다, 빈 시간을 대강 떼우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고작 이런게 인생인가 싶으면 허무하다만 단순해서 좋기도 하고. 참나, 제대하고 식료품 포장 알바를 할 때랑 다른 게 없다. 나는 아직도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그땐 양 손 검지손가락 옆에 굳은살이 생겨 한결 수월하기라도 했지.

무심코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다, 각지고 미끈한 감촉에 흠짓 놀랐다. 담배를 끊은지는 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종프레소다. 네가 즐겨 피던 담배. 작년 봄코트를 옷장에 넣을 때 깜빡하고 빼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쎄지도 않고 커피향이 나 기분전환으로 피기 좋다고 했었지. 그 하얗고 곧 부러질듯 한 형태가 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제작년 봄, 너는 취준을 앞둔 4학년이었고, 나는 갓 대학원생이 된 차였다. 교양수업 팀플로 만난 연이 있어 가끔 인사만 하고 지냈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자주 도서관에서 마주쳐 가끔 자판기 커피나 담배 정도 나누곤 했다. 별 시덥지 않은 얘기로 밤공기를 떼우다 어색한 정적이 흐를 때면 너는 운동화 코를 탁탁 찍었다. 다 헤진 너의 발끝을 보다 어쩐지 열람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엔 술 한잔 하자 할까 싶기도 했지만, 관뒀다. 취업시장으로 내몰린 여자와 대학원으로 도망친 남자라니. 너와 내가 술집에서 연출될 수 있는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홍상수다.


 대신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택했다. 거의 매일 도서관이 끝날 시간에 맞춰 너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함께 쪽문 계단을 내려갔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달동네의 빛은 위태로이 명멸하고, 우린 그 빛을 나란히 하고 걸어 내려갔다. 너는 평소엔 잘도 쫑알거리면서 그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보다 한 발 앞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발을 내딛었다. 저러다 풀썩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싶었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보호자로써 침착하게 119를 부르는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돌렸는지. 그렇다고 내가 널 사랑한다거나 한 건 아니다. 적어도 그 때 까진 아니다. 그저 그 위태로운 걸음걸이가 조금 신경이 쓰일 뿐. 아마 너를 보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싶다.

 무튼 그 날도 너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밤냄새가 유난히 짙고, 오늘처럼 바람이 가벼운 날이었다. 마케팅 공모전 발표날이라 했던 것 같은데,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또 떨어졌나 보다. 너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벚꽃이 참 이뻐요.”
 “뭔 소리야, 벚꽃이 어딨다 그래.”
 “저 나무들이요, 다 벚꽃나무에요."
“그건 알지."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요. 아무도 몰라주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꽃피우는 중인데, 지금도 저 나뭇가지 안에선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피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잖아요. 저 나무가 벚꽃나문지, 동백나문지, 아님 꽃을 피울 수 있기는 한 건지."
“…"
“하나도 관심 없었으면서… 그 모든 웅크렸던 시간들이 폭발하듯 피었을 때, 그제야 사람들은 외치죠. 아, 벚꽃 이쁘다. 봄이 왔구나.”

너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이를 악 무는 건지 귀 뒤가 움찔거렸다. 나는 문득 너의 깡마른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말했던 것 같다.

“그래, 벚꽃이 참 이쁘다 서연아.”


 사실 그 날 이후의 기억은 산발적이다. 너의 자취방에서 몇 번 밥을 얻어 먹고, 몇 번 사랑을 나누고, 몇 차례의 계절을 함께 보내다 헤어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한 번도 너의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다. 너는 어느 겨우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겠다더니 영원히 나를 떠났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참 많은 순간들을 함께 했는데 이따금씩 툭툭 튀어오르는 너의 영상은 책상 앞의 너도, 침대 위의 너도 아닌, 벚꽃을 말하던 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의 너처럼 이를 악 문다.

 담배는 이제 여차하면 불덩이가 입술에 닿을 정도로 타들었다. 찝찝한 커피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이렇게 얇아 빨리 타버리는 게 너는 뭐가 좋다고 고집이었을까. 꽁초를 바닥에 던지곤 다시 대로로 나갔다. 까만 도로 위로 자동차가 휙휙 지나가는 게 꼭 자동차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도로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이제 다시 컨베이어 벨트로 돌아갈 시간. 준비운동을 해야지. 찌뿌둥한 고개를 돌리다 하늘을 가르는 가지 끝에 무언가 맺힌 게 보였다. 꽃봉오리였다.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너는 어디에 있니. 

너는 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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