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선택을 한다. 눈에 들어오는 간판과 광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와 냄새, 바람까지 모든 자극이 동시에 밀려오지만,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만을 인식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뇌는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지 않고,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만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길을 걸으며 빨간 차를 몇 대나 봤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대답하지 못한다. 빨간 차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의도도 없는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에 돈이 걸린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갑자기 거리에는 빨간 차가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기준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주의력이고, 주의력에 의도가 결합되면 무엇을 보게 될지, 무엇을 놓치게 될지가 결정된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새로운 통찰이나 관찰력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이미 마음속에 설정된 렌즈가 작동한 결과에 가깝다. 이 렌즈를 철학적으로 부르면 전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이미 쌓여 있는 경험, 지식, 믿음, 관심사가 필터가 되어 세상을 해석한다.
문제는 이 전이해가 인식의 출발점이 될 뿐 아니라, 점점 판단의 감옥으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세상은 온통 투자 신호로 가득 차 보인다. 부동산 투자자는 도로 위의 아파트 단지를 먼저 보고, 주식 투자자는 마트 진열대와 뉴스 헤드라인에서 매출과 실적을 떠올린다. 이전에는 흘려보냈던 말과 풍경이 갑자기 의미를 얻는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통찰력을 얻었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은 조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전이해는 집중을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결핍을 낳는다.
더 위험한 순간은 이 전이해가 믿음의 형태로 굳어질 때다. 인간은 믿음에 매우 취약한 존재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아남아 왔기 때문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직접 확인하는 대가는 너무 컸고, 타인의 경험을 신뢰하는 편이 생존 확률을 높였다. 그 결과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에는 편안함을 느끼고, 그 믿음을 흔드는 정보에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이 지점에서 확증편향이 등장한다.
이미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과 맞아떨어지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충돌하는 증거는 애써 무시하거나 재해석한다.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목에 마음을 주는 순간, 우리는 그 종목에 유리한 뉴스만 수집하고 불리한 신호는 일시적인 소음이나 오해로 치부한다. 처음에는 관심이었지만 어느새 신념이 되고, 신념은 곧 방어의 대상이 된다. 전이해는 이해를 돕는 도구로 출발했지만, 확증편향과 결합하는 순간 판단을 왜곡하는 장치로 바뀐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는 이 과정을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충분히 조사했고, 많이 생각했고, 논리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논리는 이미 선택된 정보 위에서만 정교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기보다, 보고 싶어 하는 세계에 가깝다.
결론은 믿음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고, 협력과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 다만 그 믿음을 끌고 가는 뇌의 구조와 전이해의 작동 방식을 자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장 성실하게 사고하는 순간에 가장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이해를 없앨 수는 없다. 대신 그것이 작동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태도는 훈련할 수 있다.
투자든, 사유든, 삶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자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가장 중요한 신호를 지나쳐 버린 채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