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라니!" 내 말을 들은 오랜 친구는 호통을 쳤다. "직장인은 원래 일 년에 한 번 떠나는 것도 힘든데, 세 번이 아쉬워?" 그저 시간이 많아서 부럽다는 그녀의 한탄에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가장 여행을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공기업과 교사와 대학원생 사이에서 작은 천문대를 다니는 난 비교적 자유로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늦잠을 자고 월요일에 쉬는 걸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괜히 월요일만 되면 침대에 아직도 누워있냐는 잔소리를 들었다. 좀 억울하긴 했다. 토요일에 일하고 밤 12시까지 근무하는 모습은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뭔지. 그래도 습관처럼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또 내뱉었고, 친구들은 한 번 더 타박하는 대신 '나도'라는 두 글자로 한숨을 쉬었다.
반면 직장 동료들은 언제 또 가냐고 물었다. 얼른 떠나야 한댔다. 이미 세 번의 여행을 끝낸 후였다. 나 역시 이미 충분하다는 말 대신 여행지 몇 곳을 언급했다. 어디가 좋을까요. 거긴 안 가봤어요! 누구랑 가야 하죠? 다들 직장인이라 같이 갈 사람 찾기가 어려워요. 혼자라도 가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여행 이야기는 항상 꽃을 피웠다. 그것도 왕 큰 해바라기 같은 꽃 말이다. 항상 같은 곳을 보는 것도 꼭 같다. 신나게 떠들고 돌아서며 생각했다. '더 여행 가면 난 진짜 파산이야. 근데 인생에 여행 한 번쯤은 더 해도 괜찮지 않나. 아직 젊잖아.' 나보다 자주 떠나는 사람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의 조언을 들을 셈이다. 얼른 떠나야 한다. 여행 쿨타임이 돌았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작은 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왕자야,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여행아, 네가 11월에 온다고 하면 난 5월부터 행복해질 거야. 비행기표를 결제했을 때부터, 아니 떠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이다. 난 한여름의 중간에서 내년 여름의 이탈리아 여행을 벌써부터 설레고 있고, 겨울이 오기 전 여행을 갈 수 있을지 각을 재며 일정표를 노려보는 중이다.
1997년 헤일-밥 혜성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혜성'이다.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지 어이없을 사람들이 있을 테니 얼른 설명부터 해야겠다.
하나. 서로 다른 세계를 넘 든다.
서울과 바르셀로나, 남양주의 한 천문대와 마우나케아 관측소. 같은 하늘 아래 엄연히 다른 세상이 있다. 어쩜 이렇게 다른 건지 마치 다른 우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두가 외계어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쓰는 것도 그에 한몫한다. 집을 떠나 이렇게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 헤매고 있을 때야말로 내가 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혜성의 고향은 오르트 구름이다. 태양에서 10,000AU 이상 떨어진(지구-태양 거리는 1억 5천만 km, 이를 1AU라고 한다.) 곳에서 태양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춥고 어두운 지역이다. 그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얼음과 가스가 뭉친 먼지투성이 돌덩어리 하나는 어떠한 계기를 만나 긴 여행길에 오른다. 그게 해왕성의 꼬임일 수도 주변 돌멩이들의 떠밀림일 수도 있다. 주변 천체의 중력에 이끌려 한 번 비틀거리면 그대로 중심을 잃고 태양을 향해 다가간다. 그럼, 고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거대한 행성들이 길을 막고, 울퉁불퉁한 소행성 무리가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태양 근처에 다다르면 느껴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태양풍을 만나게 된다. 차갑고 어두웠던 오르트 구름에서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다.
둘.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연료가 필요하다.
혜성은 정말 아름답다. 특히 두 개의 긴 꼬리가 장관이다. 고향인 오르트 구름서부터 가지고 온 가스들이 태양 복사로 인해 증발하면 우주에 빛나는 이온 꼬리가 만들어지고, 그 가스들이 증발하며 우주로 흩뿌린 먼지들은 반짝이는 먼지 꼬리가 된다. 꼬리는 지구와 태양 사이를 가득 메울 만큼 길다. 그리고 지난자리에 길이만큼이나 많은 먼지를 두고 간다. 남겨진 먼지와 지구가 만나면 별똥별이 잔뜩 떨어지는 유성우다. 혜성은 말 그대로 지나온 자리도 아름다운 천체인 것이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다만 공짜는 아니다. 일한 걸 고스란히 내놓고 가라! 여행의 연료는 말해 뭐 해, 당연히 돈과 시간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금수저는 아니지만 운은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전공과 관련된 직장에 내 리듬과 잘 맞는 근무 환경, 여행을 좋아하거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을 잘 이해해 주는 직장 동료가 있다. 돈과 연차를 태워 떠난 여행은 여지없이 반짝이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어떨 때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여행지에서는 관광하는 순간뿐만 아니라커피를 기다리는 순간도, 운전하는 순간도 하나하나가 값진 추억이다.
셋. 견디는 시간은 길고 빛나는 시간은 짧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솟구치던 도파민과 하루에 2만 보씩 걷던 체력이 사라진다. 분명 여행은 10일이었건만 한 시간 만에 귀국한 것 같다. 그리고 일상은 색을 잃는다. 여행이 빛나면 빛날수록 후유증이 크다. 마치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인데 강제로 쫓겨난 기분이다. 365일 중 단 10일이 날 이렇게 만든다. 매일 여행지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다. 어떻게 매일이 빛나겠나. 그렇기에 돌아오는 길에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기 전과 같은 일상을 보낸다. 일상을 살아야 여행도 갈 수 있는 것이다.
혜성에 달린 두 개의 꼬리는 태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길고 짙어지다 멀어지면서 곧 사라진다. 그러고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고향인 오르트 구름에 다녀온다. 혜성의 궤도는 아주 찌그러진 타원 모양으로 태양 근처에서는 아주 빠르게, 멀리서는 아주 느리게 운동한다. 덕분에 긴 주기와 짧은 관측 기간을 가진 혜성들이 참 많다. 2023년 밤하늘을 장식했던 츠비키 혜성은 50,000년마다 태양 근처로 온다. 츠비키 혜성이 태양 근처에서 기다란 꼬리를 만든 건 단 석 달이다. 석 달을 빛나기 위해 무려 5만 년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2020년 한국에서도 많이 관측했던 네오와이즈 혜성(표지)도 주기가 무려 6,000년이지만 볼 수 있었던 건 한 달 뿐이었다. 그들 역시 쏜살같이 빠르게 태양 곁을 스치며 아름다운 한때를 즐기고는 지루한 일상을 보내러 떠났다.
항상 태양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행성과 달리 혜성은 뜨거운 태양과 저 먼 오르트 구름 사이를 오간다. 혜성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자’인 것이다. 행성의 ‘행(行, 다닐 행)’ 자가 무색할 따름이다.
난 인생의 궤도를 혜성처럼 기울였다. 이름하여 '혜성 인간'이다. 주기는 한 서너 달 정도인가. 그러다 보니 연료가 충분치 않아 꼬리가 길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도 난 이게 딱 좋다. 때론 지루하게 보이는 '행성 인간'들의 쌓여가는 적금과 안정성이 부럽기도 하지만 난 역시 ‘혜성 인간’이 맞다. 꼬리를 만들며 푸르게 빛나는 한때를 맞이하고, 그때를 위해 빛을 잃어 보이는 순간도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곱씹으며 견뎌낸다. 그러다 보면 다시 한번 빛날 때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