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Apr 30. 2024

반딧불이와 별과 도시

쿠알라룸푸르에서 찾은 고민

얻으려면 왜 매번 하나씩은 포기해야 할까.


 멋진 몸매를 만들기 위해선 맛있는 걸 포기해야 하고,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잠과 주말을 포기해야 하며, 집안이 깨끗하게 유지되려면 주말에 게으르게 누워있을 수 없다.

 둘 다 한 번에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택을 한다.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멋진 몸매보다는 빵과 과자를 많이 먹고 싶다. 높은 점수와 명문 대학도 좋지만 8시간의 숙면은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주말 하루를 다 써도 좋으니 집은 정돈되고 깨끗해야 한다. 그래서 적당한 뱃살과 평범한 대학, 아주 깔끔한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선택이다.


 나는 이러한 선택에 길게 고민한 적이 없다. 별로 큰 후회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올해 떠났던 여행지에서 아주 머리 아픈 고민을 하나 만났다. 뭘 선택하든 좋을 것 같고, 뭘 선택하든 아쉬울 것 같아 어렵다. 가지고 싶을 만큼 탐나지만 막상 그걸 위해 포기할 걸 생각하니 망설여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다.


 별 기대 없이 떠난 여행지는 생각 외로 정말 멋진 곳이었다. 더운 나라답게 쑥쑥 자라 있는 나무들이 빌딩 사이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푸른 나무와 반짝거리는 유리 빌딩 사이로는 지상철이 다니며 도시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의외로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건 구색을 맞추려 끼워 넣었던 원데이 투어였다.

온 도시가 정글처럼 푸르렀던 쿠알라룸푸르

 하루 중 제일 더운 오후에 출발하는 이 투어의 이름은 '반딧불이 투어'. 해가 지기 전까지 쿠알라룸푸르 근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고 밤에는 반딧불이를 보는 일정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속지 마시라. 반딧불이라는 이름에서 힐링을 떠올렸던 나는 관광지 서너 군데를 돌며 산을 오르고 야생동물들 먹이를 주며 혼쭐이 났다. 체력과 정신이 쏙 빨려나가 버려서 가이드가 우리를 보트에 태울 때까지만 해도 반딧불이는 깜빡 잊고 있을 정도였다.


 보트에 앉아 한 숨 돌리며 시원하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강변의 식당들이 만드는 멋진 야경을 열심히 찍다 어느 순간 건물들이 사라지고 보트가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눈을 아무리 돌려도 보트에 달린 조명 말고는 볼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 멀찍이 앉은 어린 친구는 무섭다며 부모님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고 사람들은 주변에 뭐라도 보일까 핸드폰 플래시를 비췄다.


 나는 오히려 그 어둠에 감탄했다. 이렇게 깜깜하다니. 여행지에서 천체 관측을 하기 위해 일부러 어두운 곳을 찾아다녔었다. 그런데 천문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이런 새까만 어둠을 만나다니 반가운 느낌까지 들었다. 날씨만 맑았으면 적도의 밤하늘을 보는 건데... 계획에도 없던 관측이 고플 정도였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깁시다 여러분. 한국 가면 찾고 싶어도 못 찾는 게 이런 새까만 어둠이라고요.'


 볼 게 없는 풍경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속으로 마디 하는 동안 보트는 어느새 강변의 풀숲 근처에 멈춰 섰다. 가이드가 사람들에게 플래시를 켜지 말라는 요청을 하고선 보트의 조명마저 꺼버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어둠. 하지만 그 어둠은 몇 초밖에 되지 않는다.

 곧이어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저 멀리 하늘과 나무의 경계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옆에 앉은 친구의 실루엣도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풀숲으로 돌리면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있다. 하얗게 반짝이는 반딧불이다.


 반딧불이는 너무 희미하고 또 연약한 빛을 내고 있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자기네들끼리 힘겹게 깜빡거리며 작은 존재감을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 했지만, 흔들리는 보트 안에서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찍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이드 몇 명이 반딧불이를 뜰채로 잡아 사진을 못 찍어 아쉬워하는 사람들 손에 담아주기도 했다.



 나는 내 팔에 앉은 작고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친구들이 이런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마음껏 유영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쿠알라룸푸르는 세계에서 발전이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라던데. 도시가 점점 더 커지고 이 강변까지 건물이 들어서게 되면 반딧불이들이 내는 빛은 쉽게 감춰지겠지. 보트 불빛도 이기지 못하는 작은 반딧불이가 어떻게 큰 도시를 이길 수 있을까. 우리들은 이런 작고 희미한 것들을 포기하며 도시를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벽을 높게 세워도 땅과 가까운 하늘은 언제나 더 밝다.

 내가 일하는 곳은 경기도 산골의 한 천문대다. 종종 방문하는 사람들은 천문대가 망원경을 가져다 대면 모든 걸 뚫고 별을 볼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흐리면 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밝아도 별은 볼 수 없다.

  수 십, 수 백광년 멀리 우주를 건너온 별빛은 반딧불이처럼 연약하다. 수 십억, 수 천억 멀리 건너온 은하의 빛은 더하다. 낮의 태양만큼 밝은 빛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아주 작은 빛에 의해 쉽게 가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빛에게 방해받는 것을 '광공해'라고 부른다.


 천문대는 광공해를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일단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망원경을 감쌀 커다란 돔을 짓는다. 관측소에는 빛을 차단할 벽까지 세운다. 해외 천문대에서는 혹시나 있을 광공해를 피하고자 관측 시간에는 일반인들의 관광을 통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불빛은 서서히 하늘 자체를 밝히며 별들을 기어코 사라지게 하고야 만다.


광공해 지도. 미 동부와 유럽, 동북아시아가 눈에 띄게 밝은 모습이다. /빛공해과학기술연구소(ISTIL)

 지난 2016년 이탈리아, 미국, 독일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의 세계 광공해 현황 분석에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2등으로 광공해에 많이 노출된 국가다. 늦게까지 환하게 불을 켜고 장사하는 가게들과 조명이 켜진 공원에서 밤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대한민국. 밤이 늦도록 잠들지 않는 도시는 한 편으로 광공해 2위라는 불명예를 만들어냈다.


 별 대신 도시를 선택한 누군가는 그게 왜 불명예냐 말할 것이다. 이렇게 발전했으니 밤에도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리곤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너는 천문학을 사랑한다면서 당연히 광공해 없는 밤하늘을 선택해야 하는 거 아니야?"

 환하고 안전한 밤을 버리고 별을 택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도시의 편리함을 알아버린 나도 마찬가지다. 쉽게 버릴 수 없다. 어쩌면 고민하는 자체가 내가 밤하늘사랑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같기도 하다.


 우리는 작은 반딧불이와 별이 빛나는 밤과 밝은 도시를 한 번에 가질 수 없다. 여행을 돌아보며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오늘도 고민해 본다. 매일 밤 내가 보고 싶은 하늘은,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쉽게 답할 수 없다. 어이없게도 창밖으로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광공해가 없었으면 하지만 집 앞에 24시 편의점과 밤늦게까지 하는 카페도 있었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뭐, 이상향이 언제나 논리적일 수는 없지 않겠어.

 평생 도시에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그 무엇도 포기하지 못한 채 여행지에서나마 희미한 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만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거운 것이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