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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y 06. 2024

이번 여행 콘텐츠가 많네

모든 게 끝난 뒤 돌아보면

 일행이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비행기 탈 시간이 다 됐는데도 친구가 전화를 안 받을 때, 구글 맵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고속도로 위였을 때, 버스 정류장이 아닌 톨 게이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산 아래의 마을이 아름답다고 해서 방문한 마을에 하필 오늘 산불이 났을 때.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쓸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이번 여행 콘텐츠가 많네.' 이 짧은 한마디는 복잡한 상황을 사소하게 만들어 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른 채 열심히 사진도 찍으며 관광하던 나

 대학 시절 인생 처음으로 혼자 떠난 한 달간의 유럽 여행. 첫 도시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돈은 없고 튼튼한 몸은 있었기에 자정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이용해 숙박과 이동을 한 번에 해결할 셈이었다. 짐은 코인 라커에 맡겨두고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 채 룰루랄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겼더랬다.

 곧 버스를 타야 하는 깊은 밤,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가게에 불이 꺼져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단다. 무슨 코인 라커가 영업시간이 있고, 문을 닫냐고 원망하기엔 출입문 앞에 너무 크게 적혀있었다.


 'OPEN : 09:00~22:00'


 내 짐은 내일 아침 9시까지 프랑스 파리에 갇혀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실수 앞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내일 일정은 어쩌지? 짐이 없어도 일단 버스 타? 짐을 옮겨주는 서비스가 있던가? 그럴 리가 있나. 야간 버스를 안 타면 난 오늘 어디서 자? 이 근처에 숙소가 있나? 핸드폰 배터리는? 여권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얼마지? 설마 노숙해야 하는 거 아냐?


 핸드폰으로 급하게 근처 숙소를 찾아봤다. 당장 예약할 수 있는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선택권은 없다.


 밤의 파리는 왜 이리도 무서운지, 홀로 주황색 가로등이 켜진 골목을 걸으며 불안에 잠겼다. '아씨….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댔는데….' 거리엔 아무도 없으면서 멀리 취한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게 들려 불안감만 높아졌다. 케밥 트럭에서 나오는 노래에도 벌벌 떨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한국인이 있었고, 그분이 건넨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눈물을 쏟았다.
 훌쩍이면서도 그분께 야무지게 샴푸와 클렌징도 빌려 개운하게 씻고 나왔다. 이 와중에 야간 버스 타겠다고 칫솔 세트와 편한 바지를 가방 안에 챙겨 놓았던 걸 발견해 울다가도 웃음이 났다.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숙소에서 제공하는 시리얼을 한 그릇 말아먹고서 내 캐리어와 상봉했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기차표는 13만 원이나 했지만 기분은 꽤 좋았다. 원래는 7시간 버스 의자에 앉아서 자야 했었지만, 나의 실수 덕분(?)에 편하게 침대에서 잔 것 같아 별로 손해 본 것 같지도 않았다. 라커 영업시간을 못 본 실수치고는 숙박비에 기차비까지 예상외 지출이 커진 건 맞았다. 하지만 환한 낮에 편한 의자에 앉아 돌아보니 돈만 좀 더 썼지 사실 별일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는 당연히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날 거라 생각했어야 하는데, 초보 여행자가 작은 일에도 너무 큰 당황을 한 것이다.


'와 이번 여행 시작부터 콘텐츠가 많네. 한국 가서 친구들한테 이야기해 줘야지.'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는 기차에 앉아 어쩔 줄 모르던 어젯밤과 오늘의 홀가분한 기분을 돌아보며 떠올린 이 한마디는 지금도 불안한 상황 속의 나를 진정시킨다. 크게 다치지만 않는다면 상황은 해결할 수 있다. 해결이 안 되더라도 언젠가 마무리는 지어지게 된다. 그러고 나면 그저 하나의 짧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1915년 그 유명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수정해 만든 현대 버전의 중력 이론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방정식에 결함이 있어 고민에 빠졌다. 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대입해 보니 자꾸만 우주가 팽창하거나 수축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100년 전 사람들에게 우주는 정적이고 고요한 공간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아인슈타인은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골치였다. 왜 내가 만든 방정식에서는 우주가 움직일까.

 아인슈타인은 1917년 '정적 우주론'을 발표하며, 중력 방정식에 <우주 상수>를 추가했다. 우주가 팽창하거나 수축하려는 힘을 상쇄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었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정적인 우주를 설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1929년,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아인슈타인이 뒷목 잡을 발표를 하나 한다. 관측해 보니 은하가 멀어지고 있다. 즉, 우주는 멈춰있지 않고 계속 팽창하는 중이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우주는 멈춰있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우주 상수까지 집어넣었는데 이제 와서 우주가 팽창한단다. 결국 1931년 아인슈타인은 임의로 추가했던 우주상수를 도로 빼버렸다. 그러면서 '우주 상수는 인생 가장 큰 실수'라 언급했다. 뉴턴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을 풀어낸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 우주 상수를 넣었다가 또 철회하면서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상수를 만들었다 없애버린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사망 후, 관측을 통해 우주가 가속 팽창한다는 것이 밝혀지며 우주상수가 부활했다. 이 발견으로 세 명의 천문학자가 노벨상까지 받았으나 최근 이 관측이 불확실하다는 논란이 나오며 우주상수의 자리가 또 위태로워졌다. 우주 상수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왼쪽),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관측한 에드윈 허블 (오른쪽)


 아인슈타인을 포함해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한 발짝 멀리서 보는 나는 우주상수 해프닝이 마냥 재밌기만 하다. 우주상수가 있든지 없든지, 크든지 작든지, 마무리되는 대로 길이길이 천문학사에 남을 콘텐츠가 될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인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이야깃거리다. 물론 해결해야 할 일에서 멀찍이 떨어져 회피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저 인생에서 당혹스럽고 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이번 생은 콘텐츠가 많네. 나중에 할 말이 많겠구만.' 그러고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마무리될 때 풀어낼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인생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겠으나 힘든 일도 하나의 인생 속 콘텐츠로 생각하는 강한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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