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타얀에서 그린 내 방학 계획표
반타얀 섬은 필리핀 세부 섬의 최북단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3~4시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작지만, 그 매력은 결코 작지 않다.
필리핀에서 일하던 시절, 로컬 친구들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섬이 바로 이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필리핀 로컬들이 휴양을 위해 찾는 섬이라기에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마음먹었고, 이번 여행에서 첫 번째 행선지로 반타얀을 선택했다.
세부 막탄 공항에 내려 북부 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을 달리면 반타얀으로 가는 항구가 나온다. 그리고 배를 타고 1시간쯤 더 가면 마침내 반타얀에 도착한다.
처음 발을 딛자마자 느낀 건 예상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 체크인도 하기 전에 당장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젖은 몸으로 배낭을 메고 걸을 수는 없으니 나중을 기약했다.
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섬이었다. 세부 시티와는 완전히 다른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 끈질기지 않은 호객 행위(이걸로 이미 합격이다), 짙게 내리쬐는 태양빛, 그리고 어딘가에서 코로 스며드는 필리핀 바다 특유의 짠내까지.
첫인상은 아주 합격이었더
이곳을 찾은 여행객 대부분은 유럽인이었고, 동양인은 몇몇의 중국인 빼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호스텔 주위를 가볍게 산책하고 저녁을 먹고 호스텔로 들어가는데 주인아줌마가 근처에 노을 명소가 있으니보고 오라고 추천해 주었다
원체 일출, 일몰에 관심이 없던 극 T인 나는 “피곤해서 안 갈래요 “라고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퍼질러 누워있는데 ‘첫날인데 한번 봐봐? 어차피 유튜브 영상도 찍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해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늘은 눈으로 담기에도 아쉬운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노을을 보고 있던 내가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에어팟으로 숏츠나 인스타 릴스를 보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는 나. 노을과 휴대폰 화면 사이에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이 귀한 시간을 마치 약속 없는 주말에 침대 위에서 뒹굴며 보내던 모습과 다를 게 없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이러려고 내가 모든 걸 멈추고 세계여행을 떠난 건가?’
세계여행 첫날부터, 그렇게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없이 눈동자릉 하늘과 휴대폰 하면을 움직이고 숙소로 향하던 중 하늘의 노을은 생각의 깊이를 더 깊숙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가 떠올랐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거실에 엎드려 하얀 스케치북에 원을 그리고 방학 계획표를 짜던 내 모습이. 그때의 계획표는 알록달록했지만, 지금 내 여행 계획표는 새하얗다. 숙제도, 학원도 없고, 정해진 저녁 식사 시간도 없다. 발표 준비도, 출근도 필요 없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유치원 이후로 하루 24시간을 나만의 의지로 움직인 날이 몇이나 있었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물론 졸업 후에도 내 시간은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쓰였다. 학교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취업 후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 시간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주 워킹홀리데이, 군대에서도 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 내 24시간의 주인은 오롯이 나다. 이 여행은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이 시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에 밀리지 않는다. 하루를 온전히 나만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채워갈 수 있다. 내 스스로 만든 기회, 남은 인생에서 또다시 이런 시간이 올지 모를 기회를 누리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날의 일정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이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지금까지도 매일 깨닫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이런 시간을 갖기 어려워질 테니,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나의 배낭여행은 겉으로 보기엔 여유로운 것 같아도 사실 꽤 바쁘다.
틈틈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한 달에 1-2권을 읽기로 했다)
영상 편집을 하고 (매주 화, 금요일에 업로드)
여행 계획을 짠다.
어느 식당이 싼 지 구글지도를 항상 들여다봐야 되고
아고다로 숙소도 봐야 한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하고
영어 공부와 스페인어 단어도 틈틈이 외운다.
일기를 쓰고 영어로 번역을 한드
웹툰도 봐야 하고 틈틈이 DIY 영상도 본다.
호스텔에서 기타 치면서 놀 때 나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으면 안 되니 팝송 가사도 외운다.
누군가에게는 새하얗고 텅 빈 도화지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 눈엔 어느 누구의 시간표보다 빽빽한 선들로 가득 차 있다.
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선들로
이런 시간을 또 가질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하고 싶은 해보고 싶은 일들로 도화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중이다
.
내 인생의 방학 계획표는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