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여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눈 발 내리는 스위스 기차 안..
내 앞자리에는 낱말풀이를 즐기는 노인이 앉아 있다. 그 옆에는 그의 부인이 밀린 신문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은 이제 지쳤는지 종이를 거치대 한쪽으로 치우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종이 위에 새겨진 옅은 잉크가 노인과 잘 어울린다. 이리로 저리로 굽어가는 기차는 쉴 새 없이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헤밍웨이의 "A Moveable feast"를 읽는다. 옹골차게 활자가 새겨져 있고 가벼운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우리 책들도 이렇게 출판하면 좋지 않을까.
취리히를 조금 지나자 모든 것이 눈으로 덮여있다. 부은 앞 잇몸이 신경 쓰인다. 태운 담배 때문일까? 괜스레 목도, 턱 밑도 아파오는 것 같다. 너무 신경 쓴 탓이겠지. 저 멀리 눈밭 사이로 크고 검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보인다. 풍경에 잠시 넋을 잃는다. 창문으로 비친 나의 모습이 초췌해 보인다. 여행을 계속하다간...
끝없이 쌓인 눈을 보니 밖이 얼마나 추울지 걱정이 앞선다. 으.. 이따 엄청 떨어야겠군. 오늘 요하네스 가족네에 가고 내일 12시에 또 떠난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면 호텔에 들어가 욕조에 몸을 담가야겠다. 그리고 책을 펼쳐 읽으리. 머리까지 몸을 목욕물에 잠그고 저항 없이 축 늘어뜨려야겠다. 푹 쉬어야겠다. 정말로 푹. 지난 3주가 또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신문을 다 읽은 노부인이 노인과 함께 낱말풀이를 지그시 들여다본다. 두 사람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함께 종이를 응시한다. 정답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다. 따뜻한 차와 사랑하는 사람, 고요하게 속삭이는 두 목소리. 밖에는 살랑살랑 내리는 눈발. 풀릴 듯 쉽게 풀리지 않는 낱말풀이....
[사진: 독일 알고이 지방 Grünenbach 인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