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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Nov 15. 2023

마지막 사인은 기꺼이 내가.

김녕 일희일비 연극교실_대본



제1장


부산스러운 월요일 아침 지연은 부지런을 떨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겨우 한숨 돌리고 커피 머신으로 아이스커피를 내린다. 지연은 좋아하는 머그잔에 시원하게 담긴 커피를 들고 화장대 앞으로 가 외출 준비를 한다. 화장을 하려고 앉은 화장대 위에 핑크색 표지의 책 한 권이 놓여있다. '다시 살아주세요' 지연이 읽고 싶어서 샀던 책이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화장대 위에 두고 오갈 때마다 눈길을 주었지만 단 한 장도 넘기기가 어려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다. 화장을 하면서도 계속 책이 눈에 밟힌다. 지연은 하던 화장을 잠시 멈춘다. 이미 무표정했던 민낯은 지워지고 화사한 표정의 여자가 앉아있다. 그녀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손가락 끝을 표지 위로 가져가 톡톡 두드린다.


그러고는 표지를 열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자신이 없는 지연은 쓱 곁눈질을 한다. 그러다 덜컥 걸리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산소포화도'. 지연은 의사가 아니지만 산소포화도는 지연에게 아픈 단어이다. 지연은 이 단어를 다시 책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을 보던 지연은 조용히 읊조린다.)


지연 : 산소포화도..


(지연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연 : 너도 참.. 고생많았다.


아빠가 암 투병 중이었던 그때. 지연은 몰아치는 암의 기세에 눌려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지연이 힘들다는 말을 꺼내기에는 더 큰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아빠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연은 거울 앞에 놓인 가족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단념한듯한 표정과 담담한 말투로 사진 속의 아빠에게 말을 건다.)


지연 : 이제 안 아프지? 그래.. 그럼 됐어.


(사진 속의 아빠가 지연에게 미소를 보낸다.)






제2장


평대리의 카페.


지연의 친한 친구인 희진과 만나기로 했다. 바다가 보이는 통창이 아름다운 카페에 먼저 도착한 지연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있다. 지연은 불어오는 바람에도 차례차례 다가오는 파도에도 푸른 바다에서도 아빠의 숨결을 느낀다.


(지연은 차오르는 눈물을 잠시 머금고 눈을 감는다. 눈물을 삼켜봐도 어지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때 카페 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지연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얼른 감정을 숨기고 반가운 목소리로 희진을 맞이한다.)


지연 : 희진아~ 이게 얼마 만이야.


(지연의 얼굴과는 달리 희진의 표정이 어둡다.)


희진 : 너는 어때?


지연 : 잘 모르겠어. 뭐..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희진 : 그래. 그건 그렇지..


(희진에게 안녕 잘 지냈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예감은 희진의 표정을 보자 더욱 확고해진다.)


지연 :  요즘 많이 바빠? 통화할 시간도 없었네 우리.


희진 : 지연아. 있잖아..


지연 : 응.


희진 : 아빠가 좀 아파..


지연 : 얼마나?


(말을 잊지 못하는 희진. 잠시 숨을 고르며 희진의 호흡이 진정되기를 잠시 기다린다.)


희진 : 많이. 시간이 얼만 안 남았어.


(올 것이 왔다. 지병이 있으셨던 희진의 아버지 소식이다.)


지연 : 아이고...


건너편에 앉은 희진의 두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희진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그냥 굵은 빗방울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희진의 눈물자국이 탁자 위에 번진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희진의 무거운 눈물이 지연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희진 :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지연 : 너 괜찮아? 아빠 말고 너. 너 지금 괜찮아?


(지연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희진의 아버지보다 친구인 희진이 더 걱정스러웠다.)


희진 : 나? 아니. 하나도... 하나도 안 괜찮아..


(울음을 터뜨리는 희진에게 지연은 조용히 손수건을 건넨다.)


희진 : 이제 어떡해.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 너무 무서워... 아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지연 : 그걸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보내드리는 거지.


희진 : 너는 이걸 어떻게 했어...


(희진은 고개를 숙인다. 들썩이는 어깨 위로 희진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느껴진다.)


지연 : 그래서. 얼마나 남으신 거야.


희진 : 연명치료 거부서에 사인을 하라고 하던데, 넌? 너는 사인했어?


지연 : 아니, 못했어. 의사가 전해주는 그 하얀 종이를 받자마자 머릿속에 하얘지던데?

그냥 눈물만 나더라. 내가 살인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도 존속살인.


희진 : 그럼 어떻게 해?


지연 : 글쎄...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겠지.. 그래도 아빠를 위해서.. 결국은 해야겠지?


희진 : 뭐? 너는 안 했다며. 근데 왜 나한테 하라고 해?

진짜 못됐다.. 그게 지금 친구한테 할 소리야?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


지연 : 안 하면? 안 하면 뭐가 달라져?


(담담한 지연의 얼굴을 보는 희진의 감정이 더욱 격해진다.)


희진 : 아빠야.. 아빠라고! 너도 못 했던 걸 지금 나보고 하라고 하고 있잖아!


지연 : 내가 못했으니깐. 그러니깐 너라도 하라고. 휴, 하긴 네가 뭘 알겠어..


(지연도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희진에게 쏟아낸다.)


희진: 나쁜.. 년. 너, 진.. 짜 나쁜 년이야. 너 같은 년은 이제 친구도 아니야. 다시는 연락하지 마.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를 견딜 수 없던 희진이 자리를 박차고 카페 밖으로 나간다.)


지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잔만 매만지고 있다. 희진이 일어난 자리에 지연의 그림자가 겹쳐 보인다. 희진은 지연이 지나갔던 그 슬픔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연이 슬픔의 입구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듯이 희진 역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주저앉아 있다.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지연 : 하게 될 거야. 그 사인.


(혼잣말을 하며 얕은 숨을 내뱉는 지연의 눈동자에도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제3장



희진의 아버지, 아빠와 같은 간암 말기 환자였다. 비슷한 순서의 고통을 느끼며 어느 정도 정해진 수순에 따라 삶을 마감하는 말기 암 환자. 암이 한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는 처참한 현장에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몸과 마음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무너져 버린 희진을 생각할수록 지연의 마음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따갑기만 하다. 인생이 이렇게 참혹하고 잔인한 현장이 될 줄을 지연도 미처 몰랐다. 생명의 소중함은 이렇게 해사한 얼굴로 다가와 모두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우리는 완벽히 망가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상실이라는 감정의 진짜 얼굴을.


(지연은 희진과 헤어진 카페 앞 바다를 바라보며 해변에 앉아있다. 뻥 뚫린 바다와 차갑게 뺨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처참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연은 희진이 겪어야 할 앞으로의 상황이 눈 앞에 그려져 마음이 더욱 먹먹해진다.)




지연의 독백



희진아.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 하기 싫어도.. 정말 죽기보다 싫어도 기어이 내 손으로 끝내야 하는 일들이 있어. 그래 맞아. 그땐 나도 몰랐어. 그런데 그런 게 있더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 같은 거 말야.


나는 있잖아. 아빠가 생사의 경계에서 초를 다투는 사이에도 그 결정이라는 놈만 붙잡고 있었어. 그놈은 내가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틈도, 주지 않더라. 그냥 무서운 기세로 다그치며 나의 목을 조여오기만 했어.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말야, 그놈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가고 없더라고. 그래서 나는 원망할 대상조차 잃어버렸어. 정말 어느 누구도 탓할수 조차 없게 만들어버리더라. 정말 미칠 것 같았어.

그 원망의 화살이 결국은 나를 향하고 있더라고. 화살을 하나 뽑아내면,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왔어.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웅크린 채로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맞는 방법밖에 없었어. 화살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나는 네가 나보다 나은 선택을 하길 바라. 나처럼 너 스스로에게 화살을 꽂으며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 그러기엔 이미 너도 나도 피투성이잖아.


나는 지금도 밤마다 생각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일 수는 없었나? 이게 정말 최선이었나..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어. 나도 가족을 잃은 게 처음이라서.


그땐 내가 하는 어떤 선택도 정답이 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신이 너무 원망스러워. 신이 있다면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남아있는 사람들도 살아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정답은 알려줬어야지. 그랬어야지. 이미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자책감에 무너져내린 사람들이 또다시 무력감 때문에 삶이 뿌리째 흔들리고 부서지지 않도록. 남겨진 사람들도 최소한의 숨은 쉬며 살 수 있도록.. 알려줬어야 했다고 생각해.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불구덩이 속에 몸부림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그 잔상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해. 누군가의 죽음이 다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잘 됐다고 생각했어. 고통의 불구덩이 속에 홀로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든 숨이 빠져나간 차갑고 딱딱해진 아빠가 더 편안해 보였어. 아빠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이 사라지더라. 그래서 나는 아빠의 죽음과 내 슬픔을 맞바꾸기로 했어. 차라리 내가 슬픈 게 나아서. 아빠만 괜찮다면 내 고통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그래.



'희진아. 너도 너만의 선택을 해. 부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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