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함덕 바다에서 첫 파도타기를 하던 날이었다. 파도를 등지고 몸을 맡기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정면으로 파도를 맞았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얼굴을 덮치고 이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마저도 재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유리구슬 같은 윤슬이 넓게 깔려있다. 푸른 바다 위에 하얗고 반짝이는 작은 빛들이 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온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 그때마다 필름 카메라처럼 흐린 잔상이 맺힌다.
찰칵-
한 장의 사진이 머릿속을 스친다.
윤슬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다섯 살 무렵이었다. 부산 송정 해수욕장, 뜨거운 모래의 첫맛은 놀랍도록 화끈거렸다. 핑크색 원피스 수영복에 프릴과 꽃이 잔뜩 달린 수영모까지 씌운다.이모 4명과 외삼촌 1명이 만들어 낸 수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나만 막내다. 가족들 모두가 나를 데리고 다닌다. 얼굴만 남긴 뜨거운 모래찜질의 기억, 사각거리던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빨간색 쿨러에 담긴 각 얼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맥주캔을 딸깍-여는 손가락까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짧게 반복된다.
해운대나 광안리보다 송정은 파도가 크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송정 해수욕장으로 간다. 지금은 사라진 검은색 타이어 튜브가 있다. 그 튜브에 동서남북으로 매달려 나를 덮치려는 파도 가까이 용감하게 다가간다. 파도가 오기 직전 등을 돌려 가뿐히 파도를 넘어선다. 저 멀리 가장 큰 파도를 기다리며 다시 파도를 향해 튜브를 옮긴다. 뒤집어지고 물을 먹어가며 파도 타는 법을 몸으로 익힌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매운 바닷물을 눈으로 코로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삼켰다. 바닷물의 맛은 잊었다. 그러나 큰 파도를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올라탔던 짜릿한 순간이었다. 파도 속으로 들어가 파도와 겹쳤다가 헤어진다. 만났던 파도를 보내주고 새로운 파도를 향해 몸을 옮기기를 반복했었다. 바닷물이 수영복으로 한껏 스며들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빠져나간다. 수영복 사이에 작은 기억만 남겨두고 미련 없이 멀어지는 파도를 바라본다. 아득해지는 바다와 옅은 웃음소리만 남은 기억 속의 첫 바다.
제주에서의 첫 여름, 아이들은 생애 첫 파도를 탄다. 아이들의 얼굴로 들이치는 파도는 작은 물방울로 변한다. 방울방울 맺힌 짭짤한 바닷물이 입술로 떨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맛보는 바다의 맛. 코끝을 찌르는 매콤한 바닷물 들이킨다. 캑캑- 몇 번의 기침을 뒤로하고 어느새 능숙하게 튜브를 운전한다. 그때 멀리서 큰 파도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