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화가의 중심
사실 얀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공표된 작품은 없다. 그러나 가끔 공식적인 자화상이 아니더라도 다른 화가와 구별되는 그 만의 본질을 강하게 드러내 화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다른 글에서 언급한 뒤러의 <Melencolia I>도 그렇고, 반 에이크의 <롤랭 수상의 성모(Madonna of Chancellor Nicolas Rolin)>가 나에게는 그런 작품들이다.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이 자화상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문스럽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화상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측면이 있다. 먼저 이 그림은 반 에이크의 시대의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스 롤랭 총리가 주문한 그림이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맞은편에 앉은 이가 바로 롤랭 총리이다.
반 에이크의 여느 그림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롤랭 총리를 비롯한 동시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상의 세계와 성모 마리아의 신성한 세계를 아름답고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씌어주려고 하는 왕관은 그 어떤 물건보다 세속적이면서도 신성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 그림은 다양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상징들과 그 표현을 보는 것도 대단한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런 상징들보다 더 내 눈에 띄는 것은 그림 정중앙에 위치한 난쟁이 같아 보이는 두 인물이다. 두 인물이 보이는가? 도대체 저 두 인물은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림 중앙의 한 인물은 붉은 옷을 입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한 인물은 붉은 터번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린 채 서있다. 두 인물은 그림 앞부분의 인물과 뒷부분의 풍경 사이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총리 뒤쪽으로 그려진 풍경은 총리의 고향인 브루고뉴의 오튠(Autun)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고, 성모 마리아 뒤에는 대성당의 풍경이 보인다.
반 에이크는 작품을 통해 세상을 매우 미세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하다. 미세한 풍경은 궁정의 모습, 자연의 하나하나의 잎사귀, 들판과 그 끝에서 반짝이느 첨탑 등 지상의 천국인 새로운 예루살렘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즉 그림 속에는 근경과 원경,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바로 이 세계와 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사이에 있는 두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너머를 바라보고 있고, 한 사람은 흘깃하고 우리를 보고 있다. 누구일까?
그리고 여기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진짜' 초상화가 한 점 있다. 어떤 학자는 이 사람이 얀 반 에이크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또 어떤 학자는 반 에이크가 창조한 인물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자 역시 화면 속에서 밖의 세상을 흘깃, 바라보고 있다. 이 초상화 액자의 테두리 하단에는 'JOHES DE EYCK ME FECIT ANO MCCCC.33. 21. OCTOBRIS', 즉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만들었다'라고 썼으며 상단에는 그의 사인과도 같은 각인인 'AlC IXH XAN(As Well As I Can)'이 쓰여있다.
다시 처음 작품으로 돌아가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물들의 위치이다. 두 인물이 두 세계, 즉 현재와 과거의 문턱이자 그림의 정중앙에 있다는 점이다. 성서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천사가 이 도시의 건물을 측량하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반 에이크는 그가 설계한 이 세계 안의 정중앙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지팡이를 든 채 흘깃하고 바깥 세계를 바라보는 인물을 위치시키고 있다. 나는 이 인물이 얀 반 에이크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미미한 생명체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중심점이 나 인 것.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물의 크기는 작지만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볼 때에 늘 생각나는 문구가 있다. 토머스 네이글, 어느 곳도 아닌 곳의 시각토머스 네이글, 어느 곳도 아닌 곳의
“세상은 너무도 다양한 시각과 사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세상을 이해해 보자면 중심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 각각은 이 중심 없는 세상에 비춰보면서, 그간 설명되지 않았던 하나의 매우 커다란 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속 고유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네이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