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모드를 전환할 때 생기는 일
매일 글쓰기를 시작한 지 열흘을 넘어 어느덧 12 회차다. 지난주에 루틴을 시작한 이후로 열정의 온도가 아직 한 번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은 덕분일까. 이제 글을 써야 한다는 심리적 문턱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습관이 내 피부에 이식(grafting)되어 완전히 생착된 기분이다.
그런데 문득 기분 좋은 문턱 너머에서 낯선 두려움 하나가 고개를 든다. ‘이제 무엇을 써야 하지?’
몸은 매일 아침 책상 앞으로 나오는데, 쏟아낼 재료가 바닥나지는 않을까 하는 백로그(backlog)의 부재에 대한 염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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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비즈니스 세계에서 백로그는 리스크다. 처리하지 못한 숙제이자 부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와 젠슨 황의 관점은 다르다. 그들에게 백로그는 단순한 미결 업무가 아니라 실행 속도가 미처 따라잡지 못해 그려져 버린 미래의 지도다. AI가 발달할수록 의미 없는 일들의 처리 속도는 가속화되고, 인간은 더 빨리 백로그의 코어에 다다를 수 있다. 만약 머스크 같은 천재에게 백로그가 없었다면 어떨까. 리소스를 최대치로 활용해야 하는 그의 뇌는 공회전하며 성과 없는 열기만 내뿜을 뿐, 과거의 디테일에 집착하거나 불필요한 고도화에 매몰될 것이다. 머스크의 천재성이 '0에서 1'을 만드는 영역에 있다면(zero to one),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제로투원을 시작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백로그 창고를 구축해 두어야 한다. 시선이 늘 새로운 목표에 고정되어 있어야 엔진의 출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어린 시절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발견한 시선의 두 가지 모드를 떠올린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의 눈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한다.
첫 번째는 ‘추적 모드(Tracking Mode)’다. 옆 차선의 특정 차 하나를 응시하고 시선이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 이는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깊은 몰입의 시간과 매칭된다. 두 번째는 ‘고정 모드(Fixed Scope Mode)’다.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저 멀리 지평선의 한 점을 응시하며, 내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차와 풍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모드에선 시야가 확장되고 평소 보이지 않던 거대한 흐름이 비로소 걸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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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백로그를 채우는 시간은 바로 이 두 번째 모드, 시야를 고정하고 일상을 받아들이는 시간에 가깝다. 새로운 볼거리를 의도적으로 주지 않으면 인간의 고개는 자꾸만 이미 지나온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나는 이 창고를 채우기 위해 본업의 분주함 속에서도 떠오르는 사유의 씨앗들을 마치 포켓볼을 쟁여두듯 잘 잡아두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절실함이 그리 크지 않은 삶을 살았다. 부모님은 계획보다 '반응과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고, 덕분에 나는 평균적인 한국인들보다 다채로운 경험을 누리면서도 큰 궁핍 없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일론 머스크 같은 창업가의 숙명적 절실함이나 nerd 같은 집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고민한다. 나의 창고를 어떤 백로그로 채워야 할지, 그리고 그 창고를 어떻게 관리할지 말이다. 비록 거창한 야망은 없을지라도 매일 아침 글을 쓰는 사람으로 분화해 가는 이 과정만큼은 명확하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를 초기부터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느꼈던 경탄처럼, 나 역시 "점점 글 쓰는 사람의 움직임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글을 꾸준히 쓰려면 글을 쓰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는다. 나에게 맞는 스윗스팟을 찾아 환경을 구축하고, 루틴을 방해하지 않는 하루를 기획하며, 좋은 인풋만을 선별해 먹는 discipline(절제력)을 장착하는 것. 시작의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큼의 절제와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책임과 재미가 적절히 버무려져야 글이라는 본연의 맛과 꾸준한 아웃풋이라는 특유의 식감이 둘 다 살아난다.
백로그가 비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작가의 감각. 시야를 고정하고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하는 관찰자의 눈. 나는 오늘도 이 낯설고도 즐거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적당히 배고플 때 정신은 샤프해지듯, 창고가 비어갈수록 나의 시야는 더 선명해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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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이미지 및 레퍼런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tAcu24DzG5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