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든, 싱가포르 손님과 첫 투어를 하다
새하얀 눈이 내리던 그날, 나는 생애 첫 투어를 진행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투어는 두 시간짜리 청와대 도보 투어. 첫 투어인 만큼 떨리는 마음에, 투어 시작 전 청와대를 가서 나 혼자 답사를 했다. 눈 덮인 청와대의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벅찬 감동과 동시에 점점 거세게 내리는 눈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안녕?! 나는 투어 가이드 '이든'이야. 오늘은 청와대를 방문하기 너무 멋진 날이야! 눈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어. 이건 꼭 봐야 해~! 하지만 추우니까 꼭 따뜻하게 입고 와~! "
손님이 혹여 대설 때문에 투어를 취소할까 봐 오늘 같은 날일 수록 더더욱 투어를 해야 한다고 어필을 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유난히 눈 내릴 때 더 아름다운 법. 그 장면을 손님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만난 손님 두 명. 두 명은 싱가포르에서 온 부부였다. 펑펑 내리는 눈에 힘들 법도 한데, 싱가포르에는 눈이 없다며 투어 내내 환하게 웃던 손님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서로에게 눈뭉치를 던지는 모습은 유쾌하고 귀여웠다. 남성 손님은 건축 관련 일을 하셔서 한국의 건축 요소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곤 했다. 푸른 기와지붕이라 청와대로 이름이 지어졌지만 아쉽게도 눈 때문에 푸른 기와를 볼 수 없었다. 15만 장의 푸른 기와가 새하얗게 변해 버렸던 그날, 그분들은 청와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국에 관심 있어하던 부부에게 한국에 대해 많이 알려주고 싶었는데 투어를 이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여러 선배 가이드분들의 투어를 첨승 하곤 했었는데 그분들처럼 자연스럽게 투어를 하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마음처럼, 생각처럼 말도 잘 안 나오고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할지 감을 잘 잡질 못했다.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은 투어였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 나의 진심과 나의 열심을 손님들도 느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눈은 더욱 펑펑 쏟아지고 도보 투어이기에 분명 다리가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 손님들은 끝날 때까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는 얼굴로 나에게 팁까지 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팁을 받아서 너무 얼떨떨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런 걸 받을 자격이 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죄송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감사하게 팁을 받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도 나의 마음을 담아 한국의 전통 과자 '미니 약과'를 건넸다. 추운 날씨 탓에 약과가 꽁꽁 얼어있었다. 손님들은 찜질방을 갈 것이라고 했고, 나는 동대문 쪽에 있는 찜질방 한 곳을 추천해 주었다. 그곳에서 꽁꽁 얼어붙은 약과도 녹이고, 몸도 녹이고, 오늘의 청와대 투어가 따뜻한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눈에 가려져 청와대의 본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웠던, 또 그 자체로 쓸쓸해 보이기도 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일대기가 담겨 있는 곳. 이곳에서 가이드로서 나의 첫 페이지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서울에서 42년 만에 가장 많은 양의 눈이 내린 날이었다.
2023년 12월 30일 토
서울의 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