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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써린 Jun 14. 2023

방학은 무엇인가.

 너희의 자유는 나의 속박. 

급식시절(초, 중, 고 시절의 은어)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비교적 가까운 학식시절(대학생 시절의 은어)을 떠올리면 물론 방학은 자유와 해방 그 자체였다. 근 십여 년을 방학이라고 하면 공포의 대상으로 살아온 학부형의 인생.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장장 8주 간의 여름방학. 학부형으로서 이렇게 길게 학교를 쉬는 것은 처음이다.


계획표 만드는 걸 좋아할 때도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아서 일단 기나긴 방학의 얼개만 잡아놓았다. 방학에 하려고 했던 활동을 위한 책 주문도 너무 늦게(어제..)해서 이번 주는 시범기간이 되겠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불편하다. 아무래도 고쳐야겠다. 


어떤 집은 자기주도학습을 촤라락 해나가는 어린이 청소년이 존재하기도 할 테지만, 우리 집은 아니다. 비슷한 척이라도 하면 반쯤 흐린 눈으로 못 이기는 척 그러라고 하고 싶은데, '엄마가 알아서 하라'니 절망이다. 하다 못해 인강(인터넷강의) 사이트 안에서 과목 선생님을 골라보라 열어줬더니 그것마저도 내가 정하란다. 엄마주도 학습은 끝내 내 인생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회의가 날 덮치는 방학의 시작이다.


그래도 다 정하고 나니 큰애는 인강의 숲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반쯤은 딴청으로 들어서 결국 인강회사 전기값이나 보태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가 코 앞에 붙잡고 있진 않다. 문제는 작은애.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해맑은 아이는 결국 나의 몫이 되었다. (시간당 얼마 쳐서 과외비를 달라고 해 봤는데 역시 묵살당했다.) 방학 동안 그간 밀린 한국 국어, 사회, 과학 과목을 해치우려고 합의를 보았는데 한 학기 내내 천천히 배워야 할 과정을 몇 주만에 끝내려니 만만치가 않다. 형이 공부했던 교과서를 읽고 문제집을 풀고 나니 여름에 영어 공부에 힘쓰면 좋을 것 같다고 자세히 적어 준 친절한 미쿡인 선생님의 학년말 성적표 멘트가 아른거린다. 영어는 언제 하지? 열심히 하고도 찝찝함이 남는 이 타지의 생활. 


먹는 건 또 어떠한가. 먹어도 먹어도 모자라다며 단 것만 찼는 한 사람과 노는 데 미쳐 먹는 건 팽개치는 한 사람의 조합을 나는 삼시 세끼를 먹여야 한다. 액상과당이 들지 않은 적당한 주스를 찾을 수 없어 (사실 찾을 수 있지만 감당이 안된다.) 한 잔 이상 먹지 말라고 샤우팅을 해야 한다. 과연 인간에게 그만 먹으라고 말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문도 든다. 반만 먹고 못 먹겠다고 팽개치는 아들을 쫓아다니며 김이라도 싸 먹으라 하기엔 애가 너무 커서 자괴감이 몰려온다. 오늘만 해도 자녀 두 분이서 스테이크를 먹겠다고 합의를 본 후 나를 호출하였으나, 내가 말없이 소고기가 가득한 버거왕으로 모셨다가 결국 저녁엔 꿍쳐 둔 등갈비를 찜해 내놓았다. 고기 타령을 할 땐 언제고 느끼하다며 지난번 먹을 때와 달리 입 짧은 미식가 마냥 수저를 내려놓아 다시 한번 나의 서비스 정신이 샤우팅으로 변신할 뻔하였다. 


학기 중에는 학교를 가고 나면 자유부인 마냥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했는데, 이건 뭐 아무것도 할 시간이 없다. 앉혀놓고 시작시키고, 돌아 서면 채점해 주고, 점심 주고 나면 다시 앉고, 알아서 좀 하는가 싶으면 간식 달란다. 그래도 학교 안 간다고 한국 공부는 모국어로 읽으면 되니까 신난 아이들을 보면서 '너희라도 방학이라 행복하면 되었다' 싶다. 




나에게 방학의 의미는 자유에서 내 시간의 속박으로, 해방에서 피로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학교 과정을 잘 따라가는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니 정 피곤하면 외식으로 때우기도 하는 등등 나름 편한 면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래도 엄청 긴 시간을 공부한 것 같아도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놀 시간도 충분한 것을 보면 방학은 방학이다. 다음 주에 이런저런 일정이 있어서 이번주는 좀 빡세게(?) 굴러가고 있지만 다음 주부터는 더 여유를 갖고 아이들과 내가 윈윈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 보아야겠다. 


누가 방학엔 좀 게을러져도 된다고 했는가. 여유 있게 놀려면 엄청 바쁘디 바쁘게 살아야 한다. 속박된 이 시간도 언젠간 끝나겠지 하면서 오늘도 하숙생 겸 과외학생 겸 단골식당 고객들에게 샤우팅을 해 본다. 너어~~ 로 시작되는 샤우팅은 방학 그 자체다.


photo from unspla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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