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의 혁신 기업 중 하나인 아마존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책, '순서파괴(Working Backwords)'를 읽었다. 아마존에서 실제로 오랫동안 일하고 리더의 자리까지 올랐던 두 명의 저자가 쓴 글이기에, 구체적인 사례와 생생한 에피소드가 담겨있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내용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PPT 프레젠테이션을 대체한 6페이지짜리 내러티브 문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예전에 회사 다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연구소 기획부서에서 일할 당시 나의 주된 업무 중에 하나가 보고서 관련한 업무였다. 남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높은 분들께 보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하거나, 내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였다. 그 당시 회사 내에서 오고 가던 모든 보고서들은 '장표'라고 불리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였다. 그렇게 작성한 슬라이드는 보고 당일 대형 스크린에 띄워졌다. 보고가 시작되면 발표자가 스크린 앞에 서서 첫 슬라이드부터 그 안의 내용을 설명하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기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슬라이드를 설명하는 것이 보고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고를 위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보고서를 작성할 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는 점이다. 내용을 채우는 데에 드는 시간이 물론 제일 오래 걸렸다. 그러나 내용이 어느 정도 작성되고 나서도 슬라이드 안의 모양을 이쁘게 만드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썼다. 예를 들면 글씨 크기는 몇으로 해야 하는지, 들여넣기는 몇 칸 하는게 좋을지, 줄간격이나 단락간격은 어느 정로도 해야 이쁜지, 맨 앞머리의 세로정렬은 반듯하게 맞는지, 많은 내용이 한 줄에 들어가면서도 가독성을 잃지 않으려면 자간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 등등 슬라이드의 에스테틱(미용) 요소 관련 공수도 엄청 들었다.
그렇게 몇날 몇일을 걸려 보고서를 만들고 나면 이제 그 내용을 어떻게 발표할 것인지 연습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같은 슬라이드를 가지고도 보고 당일 스크린 앞에서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보고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발표하다가 조금이라도 말을 버벅대면 그 다음부터는 회의 참석자들이 보고 내용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기도 했다. 보고자가 내용을 잘 몰라서가 아니라 긴장해서 그럴 때도 있었으나, 긴장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준비한 보고서 내용 자체가 부정되는 억울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보고하는 형식은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고 당일 보고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아마존에서는 이러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보고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 명 이상의 팀원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띄워가며 구두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우리는 이런 프레젠테이션이 의도했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자주 경험했다. (중략)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아이디어를 충분히 표현하지 않는) 분절된 문구들을 띄엄띄엄 던지는 양식이면서, 이해를 돕기보다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각종 시각 효과를 조장하고 있어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다른 아이디어와 비교해 살펴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짜로 위험했던 까닭은, 파워포인트가 의사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언변이 뛰어난 발표자는 형편없는 아이디어로도 쉽게 안건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엉성하게 구성된 프레젠테이션은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더라도 토론을 장황하고 지루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진지한 논의를 이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엄청난 인과관계가 얽혀있는 복잡한 사안들을 한 장의 슬라이드 안에 구겨 넣기 위해 억지로 개조식으로 내용을 압축해 쑤셔 넣었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것이 보고의 최선, 아니 유일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식으로 보고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마존은 '6페이지 내러티브 문서'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그날 보고되어야 할 내용을 구어체로 서론, 본론, 결론이 있는 문서로 정리하는 것이다. 물론 필요에 의해 약간의 그래프나 표가 추가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체 내용은 서술형이어야 하고, 정해진 글자크기와 줄간격으로 최대 6페이지를 넘겨서는 안 되는 방식이다. 회의 때는 참석자들이 모두 해당 문서를 출력물로 받아서 회의 시작 후 20분 동안은 각자 침묵 속에 문서를 읽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발표자의 발표 같은 것 없이 바로 질의응답이나 의사결정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과거 회사에 있었던 여러 CEO들 중, 슬라이드 보고서의 전체 내용을 구어체로 설명하는 한 장의 요약본을 매번 별도로 요청하는 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오늘 보고드릴 내용은 금년 3/4분기 실적과 이슈에 대한 내용입니다. 해당분기 실적은 전년 대비 **% 증가하였으며 그 주된 요인은 *** 때문이라고 판단됩니다."라는 식으로 기술된 한 장의 요약본을 슬라이드 맨 앞에 붙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요약본을 작성하면서 엄청 투덜거렸었다. 어차피 슬라이드를 보면 알게 될 텐데 왜 굳이 번거롭게 두 번 일하게 시키냐며 불평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마존 내부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 그 CEO가 지시했던 요약본이 바로 아마존의 내러티브 문서와 같은 목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아마존의 이런 방식이 충격적이었던 두 번째 이유는, 6페이지 내러티브 문서 방식은 모든 보고자들의 글쓰기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유다. 파워포인트 여러 장에 들어가는 방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문서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냥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말을 종이에 옮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고, 보고의 목적을 명확히 규정해야 하며, 독자가 집중할 수 있는 흐름으로 스토리를 짜야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보고용 문서 작성은 엄청나게 정교한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것처럼 창의성, 집중력, 논리력 등이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그것도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든 마케팅 담당자이든 똑같이 문서 작성이 가능하다니, 그것이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잘 모르지만 아마 한국보다는 미국의 학교들이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향상에 좀 더 공을 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만약 운 좋게 아마존에 입사하게 되더라도 충분한 글쓰기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인가!
비단 6페이지 내러티브 문서라는 보고방식 하나 때문에 아마존이 지금의 성공한 기업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그들이 오랫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도해 온 보고 방법 중 그것이 베스트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중거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기업에서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안에 내용을 욱여넣고 반듯한 네모와 도표로 장식하느라 밤중까지 야근하며 괴로워하는 직장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줄맞춤과 단락간격을 맞추느라 소비하는 시간을 절약하여 핵심을 전달하는 문서로 보고를 진행하게 된다면 한국 기업들도(적어도 보고 담당하는 사무직 부서들도) 생산성이 훨씬 향상되리라 생각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글쓰기 트레이닝이 전제되어야겠지만. 과연 한국의 어떤 기업이 먼저 아마존과 같은 내러티브 문서의 보고방식을 채택하게 될지 참으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