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앤온리 Oct 31. 2023

회사에서 아름답게 망하기

 -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으로 일하기

대기업을 퇴사하고 얼마 안되어서 벤처기업에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육아 때문에 대기업을 퇴사했던 터라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파트타임으로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해도 되고 재택근무도 괜찮다고 설득하길래 제안을 수락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그것은 바로 내 본캐(본 캐릭터)를 내려놓고 부캐(부캐릭터)로 일해보겠다는 것. 마침 그 당시 TV에서는 많은 연예인들이 부캐로 활동 중이었다. 개그맨 출신 유명 MC는 부캐로 트로트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다른 연예인들도 본래의 직업을 두고 부캐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부캐가 유행을 타면서, 원래 나의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다른 사람처럼 산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새로 시작하는 회사에는 나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전혀 다른 사람인 부캐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나의 본캐의 특성과 성격들을 리셋해서 그 전 회사에서 저지르던 잘못들과 실수들을 털어내고 실수 없는 완벽한 직장인으로 새출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캐로 다시 태어나며 버리고 싶었던 본캐의 특성 중 하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나는 원래 누가 뭐라고 하면 그걸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업무에 있어서는 그 업무를 왜 해야 하고, 왜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고, 하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시시콜콜히 따진 뒤에 시작했다. 상사가 지시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업무에 대해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비로소 매진할 수 있었다. 화학회사 재직당시 어느 날 상사인 상무님께 “일 시키면 제가 고분고분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요?”라고 여쭈어보니, 상무님이 웃으며 “응. 아니지. 엄청 아니지.”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 상무님이 훌륭한 리더라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부리기 쉬운 부하직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운 회사에서는 이런 모습은 바꾸고 싶었다. 누가 일을 시키거나 부탁하면 그냥 토 달지 않고 고분고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삐딱하고 뾰족한 직원이라는 이미지를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마침 새 회사에서는 업무분장도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무엇을 해달라고 하면 다 해주었다. 대기업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이 회사에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고 싶었다. 


또 한 가지 버리고 싶었던 본캐 특성 중 하나는 ‘오지랖’이었다. 전에 대기업에 다닐 때 별명 중 하나가 ‘오지라퍼’였다.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일단 무슨 상황이든 알게 되면 끼지 말아야 할 곳에도 나서서 끼곤 했다. ‘낄끼빠빠(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지는 것)’는 내 성격상 맞지 않았다. 일단 무슨 일이든 알게 되면 행동해야 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한 것 같으면 그가 청하기도 전에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그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대신 싸워주기도 했다. 그런다고 해서 상대방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곤란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혼자 맘대로 도와주고 혼자 상처받는 일들도 생겼다.


그래서 부캐로 일하는 새 회사에서는 오지랖을 버리고 싶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있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누구와 누구 사이에 갈등이 있던, 누구가 어려운 업무로 힘들어하던 신경 안 쓰고 내가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좀 부당하다 싶은 행동을 해도 바로 나서던 예전과 달리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부캐로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부탁하는 일을 거절 않고 다 받아서 하다 보니 일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애당초 육아에 집중하고자 대기업을 퇴사한 것이었고, 이 회사도 파트타임으로 쉬엄쉬엄 해달라고 하길래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의 양이 늘어나다 보니 점점 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종일 방에서 일하는 엄마를 보며, 자기들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다면서 왜 집에서도 계속 일하냐고 아이들이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일을 내가 왜 하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일에 대한 재미와 보람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오지랖을 접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 회사에서 HR(Human Resource) 관련 일을 주로 해서 그런지 직원들이 자진해서 면담을 청해왔다. 각자 여러 이야기를 들고 와서 생판 모르던 새 직원인 나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들과의 상담 동안에는 물론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나, 그 이후에는 들은 이야기들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즉 오지랖을 부려서 나서서 해결해 주거나 중재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아무런 직책도 권한도 없는 일개 파트타임 직원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스리며 못 본 척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참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나서면 상황이 해결될 것 같아 보이는 경우에도 참고 있으려니 너무 답답했다. 내가 나서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걸 모른 척하는 게 맞는가 하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다. 부캐로 사는 것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기로 했다. 그제야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보람도 느꼈다. 물론 본캐로 돌아오며 다시 많은 실수도 했다. 하지만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나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질책보다 도움과 성과에 대한 감사가 더 많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인 비로소 내가 이 회사에 도움을 제대로 줄 수 있는 직원이 되었다는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30년 경력의 카피라이터 이원홍 작가는 그의 저서,『일을 잘하고 싶은 너에게』에서 딸에게 쓴 편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은 바 있다.


일을 하면서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을 욕심내지는 말자. 일하는 자의 목표가 스티브 잡스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할 뿐이야. 나는 스티브 잡스가 아니며 앞으로도 스티브 잡스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걸 단호히 밝혀두고 싶구나. 우리는 간신히 우리 자신이 되거나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을 뿐이지. 그러니 매 순간 백 퍼센트 나 자신으로 일하자. 회사나 세상이 알아주면 행운이고, 끝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이지.


부캐로 다시 태어나서 스티브잡스가 되려고 노력해 봤자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족하고 모자라도 나는 ‘간신히 나 자신이 되거나 마침내 나 자신이 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디선가 듣기로 ‘아름답다’는 ‘나답다’는 어원에서 왔다고 한다. ‘나’ 다운 것이 곧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생망.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 그냥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원래의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하더라도 괜히 다른 사람인 척하다가 망하지 말고 나답게 망하자. 나답게, 아름답게.




사진출처 :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운전 스승 두 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