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월드컵이 있었던 2002년도에 운전면허를 획득한 뒤로 20여 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직접 운전하면서 교통사고가 났던 일은 딱 한 번, 그것도 상대방 과실의 가벼운 접촉사고 뿐이었다. 나름 괜찮은 운전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만 하지 않은가? 직장생활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운전실력 자랑이냐고? 그건 바로 나의 인생에서 운전을 제대로 하게 가르쳐준 두 명의 스승님(?)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2002년 운전면허를 처음 획득할 당시는 영국에 장기 출장 가있던 시절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국에서는 차가 없이는 생활이 정말 불편했다. 그래서 한국에 잠시 들어온 사이 부랴부랴 면허증을 취득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회사에서 렌트해 준 렌트카를 몰았다. 그것이 나의 첫 운전 역사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운전하는 것이 정말 두려웠다. 우선 자동차를 내 손으로 몰아보는 것이 면허 취득시험 때 빼고는 완전 처음이어서 두려웠다. 손 따로 발 따로 움직여야지, 눈은 앞을 봤다가 백미러 봤다가 사이드미러 봐야지. 신호등 봐야지, 옆에 지나가는 차 봐야지…운전하며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 조금만 방심하고 하나라도 놓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사고가 나서 다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고 때문에 회사에서 다시 렌트카를 회수해 버려서 뚜벅이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이 훨씬 두려웠다.
게다가 영국은 한국과 도로 진행방향이 정 반대였다. 우리는 도로에서 오른쪽 차선으로 주행하지만 영국은 중앙선의 왼쪽 차선에서 차가 움직인다. 운전석 위치도 우리나라와 반대여서 우리나라 차의 조수석 자리가 영국 차의 운전석이다. 이 때문에 밤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운전석이 텅 빈 것을 보고 귀신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개인적으로 돈을 내고 개인 교사를 찾아서 퇴근 후에 도로주행 연수를 받았다.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계 남자 선생이었다. 이 사람이 나의 운전 스승님이냐고? 아니 천만에. 가뜩이나 영국식 영어 억양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잔뜩 긴장해서 핸들을 잡은 채로 인도식 억양의 빠른 영국 영어를 듣는 그 상황이란! 몸도 머리도 눈도 귀도 손도 발도 혼란스러운 대 환장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현지인 운전연수를 5번 만에 포기했다. 그러자 당시 나와 같이 영국에 출장 와 있었던 송부장님이 나의 첫 번째 운전 스승이 되었다. 그는 내가 운전할 때 조수석에 앉아 한번도 화내는 일 없이 웃으며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었다.
“후진할 때 핸들 돌리는 방향은 원래 헷갈려. 그래서 후진하며 옆차를 긁는 건 초보들이 아주 흔히 하는 실수야.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하면서 해봐. 천천히만 하면 할 수 있어.”
핸들만 잡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그가 그렇게 차분히 이야기하니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면 빨리 호텔로 돌아가 쉬고 싶을 만한데도 조수석에서 천천히 가르쳐주며 웃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가 설명해 주는 이야기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특히 잘 할 수 있다며 격려해 주는 그의 따스한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자신감이 붙었다. 몇 년 후에 그는 퇴사하고 일본어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그 덕분에 영국에서 운전 실력이 쑥쑥 늘었다. 처음엔 호텔과 사무실로 출퇴근만 하다가 나중엔 런던 시내까지 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런던 시내는 서울 못지 않게 차가 많고 복잡한 곳이었으니, 그런 곳에서도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비록 시내 라운드어바웃(한국으로 치면 로터리)에 진입할 때 역주행해서 많은 영국 운전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한 적은 있지만 사고는 한번도 나지 않았다. 주말엔 회사와 호텔이 있던 슬라우(Slough)라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캠브리지(Cambridge)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고속도로는 속도가 높으니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나중에 더 신이 나서 주말 낮이고 밤이고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운전에 자신이 붙은 뒤에 이번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장기출장이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차를 렌트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같이 출장 갔던 김과장님이 주로 운전을 했다. 회사에서 나름 배려해 준다고 바닷가 경치 좋은 곳에 숙소를 잡아주었는데 그 덕(?)에 호텔에서 사무실까지 거리가 꽤 되어서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영국에서 호텔과 사무실이 약 10분 거리였던 것에 비하면 훨씬 긴 거리였다. 그래도 김과장님이 운전을 해주니 편하게 타고 다녔다.
그러나 출장이 길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김과장님과 다른 출장자들이 퇴근 후에 바로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시내에서 술 한잔씩 기울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급기어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차만 타면 곯아떨어질 만큼 술을 많이 먹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저녁 먹고 나와서 차를 운전해서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모두가 차 안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운전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문제는, 20년 전인 당시에는 차에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은 영국이 아닌 포르투갈. 즉, 모든 교통 표지판이 영어가 아니라 포르투갈어로 쓰여있다는 것이다. 빨강과 초록의 신호등 색만 빼고는 교통 표지판을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눈으로 표지판을 보고는 있지만 거기 쓰여있는 글씨가 머릿속으로 입력되지가 않았다. 표지판은 그저 초록 바탕에 흰색 선이 그려진 그림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아야 했다. 길눈이 밝은 편이긴 했지만 낮과는 달리 밤에는 풍경이 달라 보여 길을 헤매는 일이 많았다. 빙글빙글 좁은 길을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어느새 아까 지나간 길에 다시 되돌아와 있는 일도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에 같이 타고 있는 이들이 잠에 들어 그들의 눈치는 안 봐도 된다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운전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 포르투갈에서도 제법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나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시내에서 보이는 바다를 중심으로 방향을 예측해서 운전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예를 들면 지금 운전 중인 도로에서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면 리스본 시내에서도 남쪽으로 내려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호텔은 리스본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야 하니, 우선 시내에서 바다가 보일 때까지 헤매 다녔다. 일단 바다만 찾게 되면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차를 틀어 달리면 호텔 쪽이라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이렇게 포르투갈에서도 운전을 제법 하게 되니 김과장님은 아예 맘 편히 나에게 운전을 맡기고 저녁 회식을 즐겼다. 초보운전자인 나를 어떻게 믿고 핸들을 맡기냐고,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하나도 안 불안해. 잘하고 있잖아. 처음부터 잘 할 줄 알았어.”
그와 다른 출장자들의 목숨이 20대 새파란 막내 사원 손에 달린 상황인데도 그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덕에 나 또한 나 자신을 믿고 마음 편히 운전하게 되는 상황에 다다랐다. 이랬던 그가 바로 나의 두 번째 운전 스승이다.
운전은 여러 가지 스킬과 반사신경 등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운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운전능력 습득이 필수이지만, 모든 운전스킬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겁이 많이 나면 운전이 어려워진다. 차선을 변경할 때도 자신감이 있어야 핸들을 돌릴 수 있고 속도를 낼 때도 자신감을 가져야 액셀을 밟을 수 있다. 생 초보에게 할 수 있다고 따뜻이 격려해 준 송부장님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믿어준 김과장님 덕분에, 나는 운전경력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자신감이 그간의 운전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KT의 신수정 부사장은 그의 책 ‘거인의 리더십’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떻게 하면 직원을 유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자. 1단계 : 상사가 직원의 능력과 성장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다. “이 직원은 능력이 뛰어나.” 또는 객관적으로도 경험과 능력이 아직 조금 부족한 직원이라면 “이 직원은 현재 경험은 부족하지만 성장 잠재력은 높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고, 대신 막히거나 더 발전이 필요한 부분은 지원하고 코칭을 해주면 된다.
만약 영국과 포르투갈에서 상사들이 믿어주고 지지하며 운전을 맡기지 않았다면 나는 운전 실력은 그렇게 빨리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단 운전만 해도 이렇게 상사의 믿음이 큰 영향을 미치는데 업무에 있어서는 오죽하랴. 아래 직원의 능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사사건건 감시하는 것 보다는 때로는 믿어주고 지지해 주자. 그것 그의 능력을 더 빨리 성장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한 번 믿고 맡겨 보시라. 그깟 업무 하나 믿고 맡겼다가 잘못되더라도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