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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Feb 10. 2024

설날에 허리 다친 며느리


두드득. 윽


의자를 잡고 엎드렸다.

손발이 부르르 떨리더니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다.


설 전날.

올해부터 제사를 받았던 터, 시댁 가족들이 집에 온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었다. 화장실 거실 바닥 청소까지 마치고, 소파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던 차였다. 스무 권 남짓씩 한 번, 두 번, 세 번째 옮길 때였다. 허리 근육이 끊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들더니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휴.


'빨리 파스 좀 가져와!' DVD를 보고 있던 아이에게 식탁 위에 놓인 부착용 파스를 붙여달라 했다. 이러면 괜찮을 줄 알았다. 과거 디스크를 심하게 앓긴 했지만 벌써 10년이 지났고 최근에도 몇 번 허리 통증이 왔을 때 약을 좀 먹으면 나았기 때문었다. 하지만 걷지도 못하게 될 줄이야..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침대 위로 올랐다. 상비약으로 늘 구비해 두는 진통소염제와 근육이완제를 먹고 남편에게 찜질용 전기매트를 꽂아달라고 부탁하고 누웠다.


큰일이다.


아직 부엌 싱크대도 못 치웠는데, 작은방 옷가지도 정리 좀 해야 하는데, 세탁실에 수건도 돌려놔야 하는데, 게다가 아무리 전을 산다 해도 산적이며 닭조림도 해야 하는데. 야 할 일들이 무너진 책들처럼 머릿속에 스르르 쏟아져 내렸다.






집안일을 할 때면, 특히 명절 전에는 더욱 부지런 해 지는 남편이다. 내 얼굴에서 우울의 그림자를 늘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허리까지 다쳤으니 머릿속에 비상불이 켜졌을 것이다. 끙끙대며 누워 있는 나를 흘끗 보고는 남편의 눈빛이 달라졌다. 팔을 걷어 부치더니 닭조림 레시피를 달란다. 얼른 스마트 폰을 들어 적어둔 메모를 보냈다. 간장 200미리, 설탕 3스푼, 미림 등등.

시간이 지나 문틈 사이로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났다. 투닥투닥 걸레질하는 소리도 났다. 제기 병풍꺼내는 소리도 들렸다. 아. 다행이다. 알아서 잘 챙기겠지, 더 깨끗이 정리하고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혼자서 모든 제사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애써 참으며 아픈 허리와 무릎을 구부렸다 펴며, 피로해진 눈을 젖은 고무장갑으로 연신 비비며 종종거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시댁에서의 명절 전 날 모습이었다.


흑. 흐느끼는 내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나 보다.

허리 통증은 여전했다. 그래도 진통제 덕분인지 식은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옆을 보니 어젯밤 읽다 만 책 한 권이 보였다. 타이탄의 도구들. 올해 1월 내에 읽기를 다짐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유독 회사에서 야근이 많았고 아이가 내내 아파 응급실에 다녀오는 등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남편에게는 미안했지만 책이라도 읽자 마음먹었다. 좀 쉬라는 신호인가 싶었다. 명절 전 날 침대에 누워있는 호사스러움을 이렇게라도 느끼니 괜히, 마음속 콩알만큼 기분이 좋.았.다.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책에 빠져들어 한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다른 책이 읽고 싶어졌다.

안나카레나. 고전 독서 모임에서 읽고 있는 책인데 이제 반 정도 간신히 읽어 내려가던 차였다. 이때다. 이것도 읽자. 마치 책에 목말라 있던 사람처럼 읽어 내려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 어찌하랴.




그리고 오늘 구정이 되었다.

밤새 통증에 뒤척였지만 어제보단 나아졌다. 하지만 허리를 곧게 펴지도, 걷지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세수를 하고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는 신념을 굳게 갖고 계신 어머님이시라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주방에 서 있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묻는다. (예? 뭐라고요? 저 허리도 못 펴는데요.)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눈치챘는지 다시 말을 돌린다.

'아. 힘들겠다. 일단 누워 있어. 내가 해볼게.'라고.

아마 남편도 어머님이 어떤 분인 지 기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딩동. 어머님이 오셨다.

나는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어기적 거리며 걸어 나갔다. 남편이 갑자기 어머님에게 큰 소리로 말을 한다.


"큰일 났어~ 일어나지도 못해. 지금 저것도 인사드린다고 엄청 낑낑거리면서 나온 거야. 어제 이거 음식 다~ 해 놓고(사실 음식도 남편이 다 했다. 어머님이 아들이 고생했다고 걱정하실까 봐 미리 한 말일테다) 청소한다고 책 들다가 삐끗했어. 어제 약국 갔더니 최대한 안 움직이고 누워 있어야 한대. 병원도 문 안 열고.. 큰일 났어~~!"


어머님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정쩡한 자세, 퉁퉁 부은 얼굴을 보시더니 의아함에서 걱정스러움으로 눈빛이 바뀌었다.


"에그~ 어쩌다 그랬어~ 얼른 누워라. 에구. 큰일 났네"






결혼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명절 전날, 그리고 명절날 음식 하나 하지 않은 것, 고무장갑을 손 근처에 가져다 대지도 않은 것.


헛웃음이 나왔다.

동안 나는 명절 때마다 참 힘들어했었지. 어제 꿈속에서 처럼. 그랬었지..


밖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먹고 설거지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처음에는 괜히 죄송한 마음에 뻐근해지는 허리 통증을 참고 침대에 걸터앉았었다. 그러다 그냥 누워버렸다. 누워서 어제 읽다 만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주인공들의 약혼식 장면이었다. 아름다운 감정의 선들이 문장들을 타고 넘나들고 있었다. 세한 묘사에 치 약혼식 장에 나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방문 밖의 소리들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고 어느새 책 속에 빠져들었다.


나는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난로의 따뜻한 불빛, 아이가 가져다 준 따뜻한 보리차, 손에 잡히는 종이의 바스락거림까지.


흐흣.

갑자기 코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엄청 달콤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절 날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오는 아주 즐거운 상상을 말이다.

휘이 휘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무 욕심 부리는 거다. 투머치다.


.

.


그래도 마음 속에서 문장 하나가 꿈틀댄다.

한 번 얘기라도 꺼내어..볼까?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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